<시론>황혜영 서원대 교수

황혜영 교수

존 레논의 아내, 비틀즈를 해체시킨 마녀로 더 유명했던 오노 요코의 예술가적 가치는 오랫동안 폄하되거나 왜곡되어 왔다.

하지만 세상의 비난과 증오와 맞서 싸울 때에도 허우적대던 고통의 순간에도 결코 창작을 멈추지 않았던 그녀가 이제 자기 자신의 가치로 평가받게 되었다.

우리에게도 그녀의 진면목이 회고전(2003, 로댕갤러리)과 클라우스 휘브너의 책 '오노 요코'를 통해 소개되었다.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선불교와 기독교, 동양과 서양의 사상들을 융합시키며 숱한 전위적인 실험을 시도한 그녀의 작품은 항상 누군가의 마지막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미완의 작품이다. "창조가 예술가만의 몫이 아니라, 관객이 작품의 내적 능력을 해독하고 해석하여 창조적 행위에 기여하여야 한다"는 뒤샹의 주장을 지지하며, 그녀는 작품의 마지막 손길을 관객에게 맡기는 것을 자기 작품의 원칙으로 삼았다.

관객은 퍼포먼스의 배우이자 예술가가 된다. 그녀는 종종 아무 오브제 없이 "잠 속에서 헤엄을 치시오, 하나의 섬을 발견할 때까지 헤엄치기를 계속하시오" "해가 뜰 때까지 숨을 쉬어라" "구름의 숫자를 세어보고 이름을 붙여보라"와 같은 간단한 지침만을 준다. 상상력을 동원하여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그녀의 작품은 유일하고 일회적이며 퍼포먼스가 끝나면 무로 돌아가고 매번 새로 태어난다. '컷 피이스"라는 퍼포먼스에서 그녀는 "무엇인가를 잘라라"는 지침만을 주고 무대 위에 말없이 앉아 있다. 선별된 관객이 한 명씩 무대에 올라와 그녀의 옷을 자르기 시작한다. 속옷까지 잘려나가 맨 몸이 될 때까지 그녀는 그대로 앉은 채 표정 없이 객석을 바라본다. 자기를 모두 비우고 부동의 자세로 앉아 스스로를 오브제로 만듦으로써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과 사물을 동등하게 보는 비차별적인 시선을 제시한다.

작품은 또한 무엇인가 잘라내고 파괴하며 은폐된 것을 드러내는 쾌감, 억압과 굴레를 벗어나는 자유와 해방감, 여성의 상품화, 폭력성에 대한 사회 비판을 담고 있다.

그녀는 터부를 깨고 남성 위주의 사고를 전복한다. 영화 '엉덩이'는 머신 위를 걷고 있는 엉덩이들을 크게 클로즈업해서 화면을 가득 메워 계속해서 보여준다.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만 엉덩이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며 "너의 엉덩이를 깨달아라. 너 자신을 깨달아라"는 암시로 관객을 자기 성찰로 이끌며, 다양각색의 남자엉덩이를 적나라하게 노출하여 남성을 성의 객체로, 여성을 성을 관람하는 관객으로 만든다. 그녀의 작품은 삶의 상처, 불만, 고통, 공포, 굴레, 억압을 그대로 표출한다.

그리고 거기에 치유의 염원을 덧붙인다. "내 작품들은 전부가 소망의 한 형태"라고 고백하였듯이, 그녀의 모든 작품은 결국 한 '소망'으로 향한다. 관객이 사다리를 올라가 천장의 빈 캔버스를 돋보기로 유심히 들여다볼 때에야 비로소 깨알 같은 크기의 yes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도록 고안한 '천장화'는 절대 긍정의 위력을 발휘하며, "무언가를 소망하라. 그 소망을 쪽지에 적어라. 쪽지를 접어 소망의 나뭇가지에 매달아라.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하라.

나뭇가지가 온통 소망으로 뒤덮일 때까지 소망하기를 멈추지 말라"는 지침의 '소망의 나무'는 소망의 쪽지가 앙상한 가지를 채우는 순간, 죽은 나무에서 꽃이 활짝 피어난다는 소망의 부활 능력을 보여준다.

"작품에 참여하면서 소망을 버리지 말라." 그것은 억압과 폭력에 굴하지 않고, 상처와 고통도 끌어안으며, 필사의 투쟁으로 소망을 지킨 그녀의 삶의 증언이자 최후의 지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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