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포럼>조동욱 충북과학대 교수

대학 졸업 후 일본계 기업연구소에 연구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자연스럽게 일본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는데 이 분들이 한국 노래 배우고 싶어 하는 곡이 몇 곡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남진이 부른 '미워도 다시 한 번'과 '가슴 아프게'였다. 그때가 1980년대 초반이었으니까 이런 노래를 일본인들이 좋아 했던 것 같다.

두 노래 모두 가사나 멜로디가 가슴 아픈 노래인데 그 당시는 노래방도 없어서 이 노래들을 가르쳐 주느라고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이유로 이 일본인과 참 친하게 지내곤 했는데 한순간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이유인즉 지금은 작고했지만 그 당시 세계챔피언이었던 김성준씨가 일본의 나까지마에게 세계 타이틀을 뺏겨서 이 문제로 서로 민족 감정을 건드려 끝내 관계 회복을 못하고 헤어졌다.

마지막 만남에서 그래도 서먹서먹해 진 것을 풀고자 일본 선수 이름이 '나까지마'인데 이걸 발음 그대로 한국말로 해석해 보면 '나를 까지마'이다.

따라서 '나를 까지마'라고 하는데 어찌 깔 수 있느냐 그래서 김성준이 진 것이라 했다.

이 말을 듣고 웃으면서 화 풀 것 같았는데 한 번 닫힌 마음을 열지 않고 무거운 표정으로 공항을 나서던 그의 모습이 생각난다.

민주화 엉망에 분노

'미워도 다시 한 번'이란 노래를 떠 올리면 앞에 소개한 일본인도 있지만 김영삼 전(前) 대통령도 가장 많이 생각난다. 내 학창 시절 김 전 대통령은 유신독재에 온 몸을 부딪쳐 싸운 분 이셨다.

우리는 '민주 회복'이라는 이 분의 말씀 한 마디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를 존경했다.

1979년에 신민당 총재 자리마저 공화당 정권에 의해 직무정지 당했고 이에 격분한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10.26의 근원이 되었을 정도로 이 분이 우리에게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컸었다.

그 후 1980년 서울의 봄이 오는 것 같더니 또 다시 전두환군사독재가 시작되었고 우리들은 민주화를 위해 항쟁했으며 그 항쟁의 중심에는 늘 김前대통령이 함께 있었다. 결국 전두환정권으로부터 6.29 항복선언을 받게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꿈에도 그리던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쟁취하였다.

6.29선언으로 얻은 직선제, 그걸 엉망으로 만든 양 김씨에게 우리는 처음으로 분노를 느꼈다. 게다가 노태우정권에서 3당 합당이 벌어지면서 우리들은 가치관의 상실까지 경험하게 된다. 그 후 집권한 김 전 대통령이 imf와 함께 쓸쓸한 퇴임….

6절까지 부르면 이민 다짐

여기까지가 노래로 치면 4절까지 한 것이다. 1, 2절은 민주화 투쟁으로 좋았고3, 4절은 민주화 밥상 걷어차 버린 것과 imf등 안 좋은 노래가사이다. 그래도 '미워도 다시 한 번' 이라고 1, 2절 가사 내용이 워낙 좋아 3, 4절까지도 봐 주었다.

그런데 노래는 통상 2절까지인데 가사도 안 좋은 것으로 3, 4절을 하시더니 이제 5절까지 부르신다. 촛불 시위와 관련하여 행하신 여러 말씀들이 여기에 해당하고 특히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이란 말씀은 세계사에 기록될 만한 말씀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향후 어떤 사안이 될지 모르겠지만 6절까지 더 부르시겠다고 나서신다면 나는 그 날로 이민가고자 한다.

조동욱 충북과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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