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우리는 광복 69주년을 맞았다. 온갖 풍파의 세월 속에 발전과 변모의 모습이 있지만, 당면한 상황에는 분명 우려의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어려운 현실에서도 과학기술의 발달은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 등 소통의 도구들을 빠른 속도로 생산해 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소통의 부재와 단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소통은 기술이나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통하는 사람이 가진 윤리와 철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근세 유명한 철학자이며 윤리학자인 마틴 부버(M. buber)는 세 가지 유형의 소통이 있다고 설파했다. '독백', '기술적 대화', '진정한 대화'가 그것이다. 연초에 오랜 지인과 대화를 나눈 일이 있다. 대화 중 서로의 생각과 견해는 다를 수 있다. 대화로써 서로를 보듬고 충분히 해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인 얘기만 강조하고, 상대방 얘기는 아예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말을 하려고 하면 일언 제하에 끊어 버린다. 그런 일이 있었던 후,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속에 담아 두자니 씁쓸하다. 꽤 오래된 일이지만 직장에서 부하 직원들 생각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목표달성을 강요하는 훈시를 쏟아 붓고는 회의가 잘됐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듯 독백은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대화를 뜻하는 게 아닌가. 상대방의 의중은 고려치 않고 혼자서 자신만을 생각하는 미성숙한 소통의 자세다. 자신은 대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을 대화로 위장한 독백일 뿐이다. 또 다른 유형은 기술적 대화다. 이것은 사실적인 내용을 전달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필요성에서 대화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내가 메시지를 전달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혼자서 이야기하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의 형식은 띠고 있다. 현란한 어휘를 구사하고 논리 정연한 말을 할 수는 있지만, 대화 상대는 어디까지나 피동적인 객체일 뿐이다. 또 하나의 유형은 진정한 대화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인격적 만남이 일어나는 소통의 대화다.

서로가 인격적 대화를 통해 관계가 형성되고, 삶의 변화가 일어난다. 내가 진정한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 상대방의 마음과 소통하는 것이다. 이런 마틴 부버의 소통관은 동양의 소통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양에서는 언어의 기술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 소통을 추구해 왔다.

가정, 학교, 직장, 사회 특히 국회에서, 우리는 주로 어떤 유형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일방적인 독백이나 현란한 언어의 기술을 사용해 상대방을 설득시키려는 진정성이 결여된 소통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지 되뇌어 봐야한다.

요즈음 국민들을 식상하게 하는 것은 국회에서 일부 정치인들이 쏟아놓는 불통의 언어, 반대에 반대를 위한 동조세력의 억지 논리와 주장은 위험수위를 넘어 불통의 진수가 아닌가. 지금이야말로 모든 생활의 영역에서 진정한 소통의 미덕이 절실한 시대다.

/정관영 공학박사·충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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