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옛 속담 가운데 '호랑이에게 물려 갈지라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속담에서와 같이 위급한 상황을 일러서 사문(死門)과 생문(生門)의 갈림길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쉽게 생각을 하면 사문이라고 표현을 하고 생문(生門)을 이야기 할 때면 언제나 통문(通門)이 보이는 것처럼 오해하기가 쉬운 것이다.
 

여기에서의 통문은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는 것이지 피할 수가 없는 죄를 범하고서도 통문을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을 할 수가 있다.
 

세상에 이치는 하나 같이 천도(天道)를 이야기 하고 하늘의 율법을 말하며 천도(天道)와 율법(律法)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때에 명분이 합당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이치(理致)에서 벗어나지 않고 순리(順理)대로 행하는 경우를 이야기한다. 무릇, 운성(運性)의 이치(理致)란 평온한 마음을 좋아하고 유순하고 겸손한 가운데에 머물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법도와 운성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위험이 지나가고 희망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반면에 위험한 상황에서 허둥대거나 우왕좌왕해 자신의 법도와 운성의 이치에서 벗어나게 되면 운성이 빛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들을 앗아가는 상황까지도 연출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측은한 것을 보면 측은한 마음을 일으키고 공손한 태도에서는 성냄이 줄어들고 평온한 것을 보면 믿음이 생겨나는 심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진실 된 마음으로 감동을 줘야 한다.
 

사람이 무엇에서 감동을 한다는 것은 진실이 있을 때에 감동을 하는 것이고 성냄을 발동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짓됨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진실한 마음과 겸손한 자세와 유순한 태도가 통문(通門)을 보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끝남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고 시작은 다시 끝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변화라고 하는 한 칸의 문(門)이 생기는 것이고 이때의 변화를 통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문은 잘못된 구습을 버리고 잘못된 언행을 바꾸며 잘못된 마음을 바꿀 때에 사문(死門)앞에서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감들이 다음 일에서의 새로운 각오가 된다.
 

그래서 계획을 좀 더 신중히 하게 되고 실행을 좀 더 열심히 하게 되며 마음을 조금 더 열심히 갖게 되는 것이다.
 

한편 사문을 만나서 통문을 보는 것은 변화의 시점이 되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안정이 없고 흔들리기가 쉽겠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기회의 시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의 시점에서는 자신을 어떻게 해야 새롭게 할 것인가를 생각을 하고 자신에서 진실로 버려야 할 것과 유지해야 할 것들을 구분해야 하며 자신의 유순한 태도를 항상 유지해야 하고 자신의 마음을 편안히 유지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작금(昨今)의 험난한 때가 미래의 양분을 만들고 작금의 두려운 마음이 미래의 각오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