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허공에다 매달면 마음은 허공이 되고 마음을 산야에다 매달면 마음은 산야가 된다.

마음을 차가운 곳에다 두면 사람도 차가워지고 마음을 덕(德)가운데에다 두면 마음도 덕(德)에서 머물고 사람은 인덕(人德)에서 멈춘다.

사람들이 말을 할 때에 어떤 사람은 유난히 인덕 많고 인복(人福)이 많다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인덕과 인복은 하늘이 누군가를 정하여서 내려주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것이다.

다만 자신의 가슴에서 인색(吝嗇)을 생활화하면 그는 인복(人福)이 유난히 없는 삶을 살게 되고 자신의 가슴에다가 보시(普施)의 마음을 생활화 하면 그는 인복(人福)이 유난히 많은 사람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이 따스하고 온화한 곳으로 쏠리는 것은 당연하고 사람의 마음이 차갑고 뜨거운 곳에서 멀어지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덕(德)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필연(必然)의 법칙이 되고 덕을 쌓는 가운데에서 인복(人福)이 자라는 것도 필연(必然)의 법칙이 된다.

그래서 덕을 쌓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마음이 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고사 성어처럼 눈앞에 보이는 작은 손실을 참아내지 못하고 가까이에 있는 작은 이익에서 기쁨을 성취하려고 보니 마음 가운데에서 저절로 자라는 독버섯 같은 인색을 보지 못하고 나중에는 인색을 정당화 하려고 한다.

인색은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은 것이고 너와 나의 구분이 뚜렷한 것이며 산술적인 계산이 매우 빠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지나치게 숫자를 밝히다 보면 인색을 멀리 하기가 쉽지 않고 지나치게 흑백논리에 강하다 보면 이 또한 인색을 멀리 하기가 십지 않다.

그러면 도대체 덕과 인색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덕(德)이 있는 것도 인색(吝嗇)한 것도 모두가 마음에서 비롯되고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것들을 성품(性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성품은 크게 아홉 가지의 주변에 여건들에서 오랫동안을 배우고 익혀서 하나의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즉 부모의 관계, 형제의 관계, 대인의 관계, 직업의 관계, 문화의 관계, 경험과 지식의 관계, 자연 환경의 관계, 가정환경의 관계, 단성에 탁정(濁淨)의 관계 등이다. 이러한 아홉 가지의 관계에서 영향을 받아 하나의 성품을 만들기 때문에 이것을 구습성지일성품(九習性之一性品)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릇, 자연의 소리와 자연의 향기 그리고 자연의 생명이 머무는 곳을 즐기는 사람은 아름다운 그것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아름다운 그것들을 사랑하면은 그가 자연의 덕품(德品)을 배워가는 것이다.

운성(運性)이 있는 곳에서는 덕(德)과 복(福)이 함께 머물고 덕(德)이 있는 사람에게는 마땅히 인복(人福)도 머무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한다.

자신의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도움도 버림도 정해지는 것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진리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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