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래(충주경찰서 연수지구대장)

남편의 외도와 잦은 폭력을 견디다 못한 한 여인이 주방에서 가스 배관을 끊고, 두 살된 딸과 자폭하려 한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순찰 중이던 경찰관을 신속히 출동시킨 후 나도 그 현장으로 달려갔다.
 

가스안전공사의 협조를 받아 잘린 가스 배관을 안전하게 연결하는 등 신속하게 현장 조치부터 했다. 
 

그리고 함께 출동한 정현수 경사와 면도날처럼 위태로운 그녀에게 차분히 대화를 시도했다.
 

우리는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바꾸고 무전기도 모두 내려놓았다. 두 살된 젖먹이와 함께 죽어버리겠다는 여인보다 더 급한 사건은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리치며 분통터져 하다가 처절한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녀 앞에 고요히 앉아 울음 한 방울 놓치지 않고 귀을 열고 다 들어줬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걱정을 끼칠까봐 친정 식구들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창피해서 친한 친구들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처음 보는 우리 경찰관들에게 풀어놨다.
 

그는 "썩어 문드러져 진물이 날 때까지 가슴 속에 묻어 두기만 했던 이야기를 다 토해내고 나니 이제는 조금 살 것 같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우리는 처음 보는 경찰관이 아니라, 상처를 쓰다듬어 주는 그녀의 또 다른 내면이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그녀가 두 살된 딸의 눈물을 닦아내고 자신의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용기를 내 딸과 함께 다시 한 번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흐느끼며 다짐했다.
 

그때 우리 경찰이 한 일이라고는 그녀의 말을 열심히 들어준 것 뿐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제대로 듣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내 말을 하려거든 먼저 남의 말을 들어야 한다. 일단 들어야 할 말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듣지 않고 말하려고만 한다. 몇 마디 말로 상대를 내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교만해지기도 한다.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도처에 넘쳐난다. SNS에도 자기 말만 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들으려는 사람도 들을 준비가 된 사람도 많지 않다.
 

남의 말은 듣지 않고 내 말만 하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강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
 

선입견은 먼저 경험했던 일이나 감정에 대한 기억을 머리 속에 넣어두고 있다가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과거의 기억을 현 상황에 대입시켜 치환해 버리는 것이다.
 

이럴 경우 상대의 말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내 경험과 판단만 중요하다. 상대의 말은 들으려하지 않고 내 말만 하려고 조급해한다.
 

가스배관을 자르고 자폭을 결심할 정도로 힘든 여인의 아픔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섣부른 선입견으로 그녀의 아픔을 수많은 아픔 중에 하나 정도로 치부해버렸다면, 그녀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경찰은 언제나 들을 준비가 돼 있다. 경찰은 먼저 말하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두 개의 귀와 한 개의 입을 정결히 하고 출근을 준비한다. 들으러 간다.

/박성래(충주경찰서 연수지구대장)

▲ 박성래(충주경찰서 연수지구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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