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을 날씨는 맑은 날이 많았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은 우리의 자랑이고, 우리 민족성을 닮은 듯하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익어가는 오곡백과는 우리의 심신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준다.

언짢은 일이 있어도 아무리 짜증이 나도, 우울한 사람도 가을 들녘과 하늘을 보면 저절로 배가 부르고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42개국의 6000여 명이 참가하는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 개회식 하던 날도 날씨가 무척 좋아 더욱 훌륭하고 멋진 개막식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올해 태풍은 연이어 한반도를 비켜 일본 쪽으로 가서, 가을비가 내린 날도 예년에 비해 훨씬 적었다.
 

 '가을에 밭에 가면 가난한 친정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속담처럼 먹을 것도 많은 풍요로운 계절이고,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벙인다'란 속담처럼 어린이들까지 일해야 할 만큼 매우 바쁜 가을철이다. 언젠가 팔순 노인도 경운기를 운전하며 일을 하시기에, 도와드리고 싶어도 경운기를 다룰 줄 몰라 애만 태운 적도 있었다. 지난 주, 모처럼 평택에 있는 처가(妻家)에 갔다.

TV를 보니 월요일부터 비가 많이 온다고 했다. 이튿날, 볼일을 보고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구순(九旬) 가까우신 장인, 장모님께서 일기예보를 보고 걱정을 하시기에 안타까웠다. 가을걷이할 것이 많지만, 처남은 드넓은 평야의 벼 수확하기에 여념이 없다.

가을비만 내리지 않는다면 조금씩 서서히 하면 되겠지만, 요즈음 기상 예보는 비교적 정확하고 더구나 전국적으로 내린다고 한다. 고심한 끝에 일정을 변경하기로 했다. 고추를 따고 뽑을 때도 마음이 언짢았다. 초기에는 작황이 좋았다는데, 농약을 제때 하지 못해 병충해를 많이 입어서였다. 다음날은 들깨를 털었다.

일주일 전쯤 베었고, 연일 가을 날씨가 좋아 잘 말랐다. 밭 가운데 그루터기를 뽑고 비닐멍석을 편 위에 망사를 깔고 깨를 털었다. 회초리로 두들겨 털다보니, 몇 십 년 전에 해보았던 도리깨 생각도 들었다. 북데기 따위를 걷어내고 양쪽에서 망사를 들고 흔드니 어레미로 치는 것 같아 손질하기가 무척 쉬웠다.

 그날 저녁 무렵까지 겨우 일을 마치고 땅거미가 내릴 때에 출발해 집에 돌아왔다. 장시간 야간운전을 하자니 무척 조심되고 피곤하였지만, 보람도 있어 일손돕기를 하고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에 가서도 봉사 활동을 하는데….

다음날 아침에 시작하여 이틀이나 비가 내렸지만, 예보와 달리 다행히 천둥·번개 없이 곱게 흡족하게 내리는 것을 보니, "사위 덕분에 금방 비가 쏟아져도 걱정 없네." 하시던 장모님 모습이 떠올랐다.

수확의 계절인지라 가을비는 봄비처럼 반겨주지는 않지만, 가을비 때문에 갈일을 서두르며 월동준비도 하게 한다. 가을비는 수확을 하는 데는 다소 지장을 주더라도, 김장채소 등에는 소중하고 훌륭한 자양분(滋養分)이 되고, 갈수기(渴水期)에 잘 모았다가 식수, 공업용수 등으로 얼마나 유용하게 쓸 수 있는가! 가을비는 무용지물(無用之物) 같지만 유용지물(有用之物)이기도 하다.

/김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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