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자연의 그 누구라도 왔다가 무량세월을 보내는 이가 있다고 하던가? 오로지 세월만이 머물러있고 오로지 하늘만이 머물러 있을 뿐이 아니던가? 그래서 한 세월을 살아왔다는 나그네에게 묻겠노니 왔음이 정녕 기쁨이던가? 오지 않았다면 기쁨도 없었겠지만 젊은 날의 고초도 없었을 것이요, 오지 않았다면 슬픔도 없었겠지만 죽음 또한 없었을 터이니 어찌하여 왔음이 기쁨이던가?

돌아가서 생각해 보건데 되돌아가는 나그네를 보고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슬퍼하는가. 보내는 이의 마음이 아파서일까? 떠나는 이의 마음이 아파서일까? 보내는 이야 이별의 아쉬움으로 슬퍼한다지만 떠나는 이야 이별을 모를 터인데 무엇으로 슬퍼하리까? 왔음이 없다면 갔음이 없을 터이고 갔음이 없다면 와야만 하는 번거로움도 없을 터인데. 지금에서 너무나 슬퍼하지는 말게나! 다시 돌아오는 그날이 쑥스럽지 않겠는가?

나그네가 살아가는 그 날을 모두 헤아려 볼지라도 영겁의 세월에서 그 얼마나 되겠는가. 나그네가 살다 가는 그곳을 모두 헤아려 볼지라도 광활한 우주에서 그 얼마나 되겠는가! 한 점의 빛깔보다도 짧고 한 항아리보다도 작은 곳을 헤매이는 나그네들! 가는 이야 광활한 우주가 제집이고 영겁의 세월이 한 생(生)일 터인데 누가 누구를 슬퍼하리까?

그리고 또 다시 영겁의 세월을 보내다가 행여나 한 점의 빛이 된다면 그가 겪어야 할 일들이야 뻔 할 터인데 그 때의 나는 또 어디에서 머물고 있겠는가? 내가 없는 그곳으로 찾아와서 애타게 찾아 헤매이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우리까? 설혹 내가 기다리는 곳으로 그가 다시 올지라도 내가 그를 모르고 그가 나를 알 수가 없음에야! 왔음이 그렇고 갔음도 그렇고 영겁의 세월 속에서 한 점의 빛으로 오고 갈 뿐인데도 아파하는 그 마음들이야 오죽이나 답답할까?

사람의 존재에서 만남은 애초에 혈(血)을 타고 왔으며 혈(血)은 수(水)가운데에서 하나이니 水는 木의 생육에서 근본이 됐다. 그리고 木은 또 다시 火로써 흩어졌고 火는 갈 곳이 무궁했으나 남은 것들만이 土에게로 가니 土는 다시 金(금)을 품어서 그 자리를 마땅히 했다. 그리고 또 金은 水를 품었으니 돌고 도는 이치의 근원에서 혈(血)의 존재는 무엇이던가?

왔다가 그렇게 가야만 하는 그대여! 그대는 영겁의 생을 한 세월로 삼을 터이고 그대가 광활한 우주를 제집으로 삼을 터이며 무궁한 안식(安息)을 평온으로 삼을 터이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는가? 공간도 없고 차원도 없고 세월도 없는 무궁에서 노니는 그대가 부럽기도 하련만은 노닐다가 다시 오는 그날에서 그대의 알 수 없는 미소를 생각하리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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