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영 서원대 교수

[충청일보]열흘 쯤 전 좀 이른 감은 있었지만 은행단풍을 볼 수 있을까 해서 보령은행나무 숲길에 갔다.

꼭 단풍이 아니라도 시골길을 걸으며 바람을 쐬고 오자 싶었다.

도착해보니 근처에 주차장이나 상점들이 하나도 없는 시골 마을이다.
 아

직 샛노란 은행은 드물고 잎 끝에 겨우 노란 물이 들까말까 한 초록빛이었다.

대신 고개 숙인 알이 꽉 찬 벼들이 들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주차장이 따로 없는지라 다들 도로변에 주차해놓고 산책을 하고 있었다.

산책로는 신씨 한옥 양쪽으로 둘레 길처럼 되돌아올 수 있게 돼 있다.
 

걷다보니 곳곳 마당에서 말리고 있는 들깨 냄새가 난다.

어릴 때는 지천에서 볼 수 있었던 들깨도 요즘은 이런 시골이 아니고서는 볼 일이 거의 없다.
 

산책을 하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 찾아봐도 주변에 공중화장실이라고는 없어 할 수 없이 남의 가정집에 가서 부탁하려고 근처 주택의 쪽문을 열고 들어가니 뒷마당 수돗가에서 할머니가 무를 씻고 계신다.
 

"실례합니다" 하고 여러 번 말해도 못 알아들으셔서 거의 고함을 지르듯이 소리치자 그제야 고개를 들고 우리 쪽을 보신다.

앉아 계실 때는 몰랐는데 몸을 일으키시는 것 자체도 너무나 힘겨워하시고 지팡이를 짚고 겨우 걸어오시더니 집안에 화장실이 있다며 밖에서 손짓으로 안내해주신다.
 

자식들이 모두 대도시로 나가 홀로 사시는 할머니는 최근 살짝 미끄러졌다가 한쪽 갈비뼈 세 개나 부러져 병원신세를 지고 또 며칠 전에 다른 쪽 갈비뼈까지 하나 부러져 그렇게 몸이 불편하게 되셨다한다.

피곤하면 방에 누웠다 가라는 말씀에 괜찮다고 인사를 드리자 손등으로 재촉하며 바쁠 텐데 얼른 가보라고 하신다.

대문을 나서는데 마음이 왠지 아려온다.
 

길가에는 또 오렌지만한 것에서부터 수박만한 것까지 색상이 알록달록한 호박이 덩굴에 달려 있다.

샛길로 한 번 가봤더니 논두렁으로 이어지는 막다른 골목이다.

집 앞에서 들깨를 말리던 할머니는 우리를 보시고 집에서 따다 말린 대추를 사려는지 물으시며 집안으로 안내해주신다.
 

자잘한 대추 한 바가지를 5000원에 사서 간식삼아 먹으며 걷는다.

작아도 달기는 달다. 노란 단풍은 제대로 못 봤지만 훌쩍 나선 짧은 나들이 동안에도 소소한 감탄과 마음 저림이 있었다.
 

요 며칠 보니 사방 나무들이 온통 울긋불긋 아름답게 단풍들고 낙엽들이 길 위에 나뒹굴고 있다.

지금쯤 노랗게 물들었을 은행나무 길가 낡은 집에서 무를 씻으시던 허리 굽은 할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