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혜 충북대 교수
객원 논설위원

띠리리리 리리리리리~~
새벽에 정신없이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친정엄마다.
어지간한 일에 전화가 없는 분인데 그것도 추석날 새벽에 전화를 하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엄만데, 심장이 너무 아파서…"
"알았어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
시계를 보니 새벽 두시 삼십분이었다.
친정에 도착하니 엄마는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가슴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아. 여기가 이렇게 답답하구나, 후아~ 후아~ 저녁을 먹은 게 체한 것 같기도 하고, 심장이 터질 것 같기도 하고, 추석 차례는 지내야 하는데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구나.
응급실에 엄마를 뉘어놓고 나니 이런 저런 생각이 밀려들어 왔다.
내 어머니는 20년 전에 내 아버지를 자연으로 돌려 보내셨다. 나에겐 시골로 시집간 여동생과 남동생이 하나 있다.
지난 긴 세월동안 내 어머니는 아마도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뒷바라지 하고 의지하며 지내지 않았을까?
우리가 곧 희망이고 버팀목이며 자랑이지 않았을까?
얼마 전에 남동생이 남은 공부를 마무리 한다고 미국에 갔다.
적적한 마음도 달래실 겸 바쁜 나를 도와주실 겸 해서 그 동안 우리 집 꼬마들 뒷바라지를 마다하지 않고 날마다 또 한 번의 할머니로서의 희생을 하고 계셨다.
추석이 다가오면서 만감이 교차 하셨던 것 같다.
아무리 손자들을 돌봐줘 봐야 막상 명절이 다가오니 시댁으로 가는 딸을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가슴으로 서운함을 지울 수 없을 테고, 멀리 이국으로 간 아들네 식구들이 새삼 아쉬워질 터이고 그 마음이 서글픔을 거쳐 알 수 없는 분노로 이어졌을게다.
혼자서 전을 부치는 당신 신세가 어쩌면 서글프기도 하고, 처량맞기도 하였을 게다.
사실 우리 집 꼬마들을 외할머니 손에서 거의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내 어머니는 딸의 뒷바라지를 지독하게 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날에는 시댁으로 들어가는 딸의 뒷모습이 가슴에 불이 날 만큼 심장을 죄여올 만큼 허하게 만들었나 보다.
침상에 누워 있는 엄마 얼굴을 보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였다.
아닌 말로 내가 평소에 시댁에 조금 더 잘해 드리고 아랫동서에게 시댁 일을 부탁하고 건너가도 좋으련만 나 자신도 그렇게 좋은 며느리가 못 되다 보니 여러 사람 서글프게 만들었던 건 사실이다.
엄마!
미안하우, 그래서 사람들이 외손자 아무리 잘 봐줘도 본전도 못 찾는다고 하나보우, 그래서 사람들이 아들 아들 하나 보우, 그래도 너무 서운해 하지 마소, 세상이 많이 변하고 있쟎소, 이번에 엄마가 아픈 건 아들 딸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 딸이 현명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니 어쩌겠소.
응급실 의자에 기대어 잠시 졸다가 추석 명절, 설 명절, 누가 만들었냐고 애꿎은 하늘만 원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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