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나가(충청대 교수)

지지난주에 일본 고향에 다녀왔다.
 

내 고향은 나가노현 나가노시, 지난 1998년 18회 동계올림픽이 개최된 곳으로 세계적인 겨울스포츠의 메카다.
 

이번이 올해 들어 세 번째 귀향이었는데 이처럼 내가 고향을 찾는 횟수가 갑자기 늘어난 것은 최근 아버지의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기 때문이다.
 

나는 집안의 장남으로 아비지가 31살 때 태어났다.
 

요즘은 워낙 늦게들 결혼을 하니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당시로선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격랑의 시대가 아버지의 청춘을 통째로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지난 1940년, 도쿄에서 유복하게 유년기를 보내고 있던 아버지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
 

아버지의 아버지, 즉 내 할아버지 되시는 분이 우정(郵政) 사업의 전문가로 중국정부로부터 초빙을 받아 베이징에서 근무하게 돼 일가족 전체가 조국에서 생활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이주하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총 5년을 중국에서 지냈다.
 

그 동안 조국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 돌입했고 그 침략의 마수가 닿는 곳마다 수탈과 억압이 자행되고 평화와 행복 대신 공포와 절망으로 채워진 자리에는 희생자들의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아버지는 목숨 하나만 건지고 무일푼으로 일본에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나이 마흔에 군대에 끌려갔다 포로가 돼 수용소가 있던 몽골에서 돌아가셨다.
 

그 후 아버지의 인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열다섯 살, 졸지에 가장이 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고향인 나가노로 내려가 그 뒤 줄곧 온몸으로 세상풍파와 싸우며 살아왔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알게 모르게 이런 아버지로부터 많은 양향을 받았다.
 

아버지는 과묵하고 엄격해서 쉽게 다가가지 못했지만, 장남이라서 그런지 그런 아버지의 입장과 마음을 동생들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타고난 개구쟁이였던 나는 어지간히 아버지 속을 썩였고, 그 대가로 맞기도 많이 맞았지만 철이 들면서 혼내는 아버지를 보고 그것이 무언의 교육이고 나에 대한 나름의 사랑 표현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한국에 오게 됐을 때도, 한국사람을 아내로 맞이하게 됐을 때도 아버지는 나를 이해하고 응원해주셨다.
 

그 아버지가 지금 아프다. 지난 2006년 어머니를 먼저 보낸 다음 급속도로 몸이 약해지셨다.
 

둘째 동생 부부가 같이 살고 있고, 일본에 발달된 개호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어서 당장 위급한 상황이 닥치지는 않겠지만 요즘 내 마음은 항상 아버지에게서 떠나질 못하고 있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날 침대에 누운 아버지 다리를 주물러 드리면서 "아버지, 장남인 제가 아버지를 모시지 못하고 이렇게 떨어져 사는 것을 보고 섭섭하시지 않으세요?"라고 묻자 "그런 생각하면 내가 벌 받지"하고 짧게 대답하셨다. 나도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가 돼 어느 새 50세를 훌쩍 넘겼다.
 

얼마 남지 않았을 아버지의 마지막 생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보람이 되고 기쁨을 드리고 싶다.

/도쿠나가(충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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