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머물러야 할 이유가 있기에 그렇게 하염없이 서 있는 것이고 물은 흘러야 할 까닭이 있기에 그렇게 하염없이 흐르는 것이다. 또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는 존재의 이유가 존재하는 것이고 작용을 하는 모든 것에서는 작용의 이유가 존재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없던 곳에서는 그것이 생겨나 새로운 이것을 만들고 없던 일에서는 그 일이 생겨나 새로운 이 일을 만들며 믿기지 않는 곳에서 그것이 생겨나 새로운 이것을 만든다. 한편으로 사람의 삶의 공간은 삼차원에서 자연계의 법칙에 의해 이끌려 가는 행위이다 보니 사람의 사고(思考)도 삼차원의 법칙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자연계에서 존재하는 물질과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우주계의 영향을 받아서 생겨났기 때문에 삼차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삼차원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돌발적인 현상도 우주계의 법칙 속에서 존재하는 현상이 될 수가 있기 때문에 삼차원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파악을 할 수가 없는 이치와 현상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우주계에서 100년을 기준으로 발생 할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1만년의 간격을 두고 발생할 수도 있으며 어떤 경우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벗어나서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자연계라는 작은 공간과 100년이라는 보편적 세월을 영위하고 있으며 그 세월은 무척 짧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계의 입장으로 볼 때에 이 작은 시(時) 공간(空間)의 법칙과 규칙은 극히 일부분의 현상이다.
 

극히 작은 것으로 모든 법칙을 파악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사고(思考)의 발로이며 사고 개념의 부족으로 발생을 하는 하나의 관념이 될 수가 있다. 이처럼 운성(運性)의 이치와 운(運)의 작용은 우주계의 현상과 이치가 되기 때문에 자연과학적인 접근 방식을 택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모한 발상이 되는 것이다.
 

마치 마음이 존재하는 것은 알겠지만 마음이 하는 역할과 작용과 잠재 능력을 알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왜냐하면 마음은 그 자체가 우주계의 이치에 존재하는 성(性)에서 비롯됐고 그 곁가지에서 온갖 형태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은 이치의 일부분으로 자리하여 인간의 심성을 지탱하면서 기둥의 역할을 하고 더불어 현상계의 인간과 우주계의 이치를 연결하는 연결 통로가 된다.
 

이때의 운성(運性)은 이치에서 존재를 하다가 그것이 마음과 함께 작용을 할 때에 드러나는 현상을 운(運)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돌발적으로 드러나는 운(運)의 현상도 근본적으로 운성(運性)의 이치에서 발생을 하고 그것이 자연계의 복합적인 상황과 함께 운(運)으로 드러날 때에는 기적과도 같은 현상이 된다. 그러니까 마음은 생각을 낳고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인격을 낳고 인격은 운명(運命)을 낳는다고 하는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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