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황혜영ㆍ서원대 교양학부 교수

▲ 황혜영ㆍ서원대 교양학부 교수
얼마 전 고속버스 안에서 텔레비전 위성방송으로 매주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참가하는 청소년 서바이벌 게임 '도전 골든벨'을 보게 되었다.

몇 문제를 풀고 나자 단 한명의 후보만 남아 답을 써나간다. 한 번은 최치원의 한시문집 제목을 묻는 질문에 그 학생은 답 쓰기를 망설이다가 찬스를 써서 친구들이 한 글자씩을 적어 날려 보내온 노란 종이비행기에 적힌 서로 다른 두 글자를 힌트로 '계원필경'이라고 답을 쓴다.

그 학생이 답을 적어 보여주기까지는 나도 책 제목이 기억나지 않다가 답을 보니까 예전에 학교에서 배워 아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내가 아는 것은 그 책 제목일 뿐인데 그 책을 안다고 할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학교 다닐 때 직접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제목이나 저자 이름, 연도만 기계적으로 암기하면서 그 책을 아는 것으로 여겨온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도 한 번 '사고와 표현'수업 시간에 '서유견문'에 나오는 '개화의 등급'을 학생들과 읽고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 책도 이 수업 전에는 제목만 아는 책이었다.

'서유견문'은 개화사상가 유길준이 어윤중을 따라 신사유람단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서 서구화된 일본의 문물을 배우고 난 후에 미국에 건너가서 공부를 하고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귀국하면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둘러보고 쓴 기행문으로 그의 개화사상이 담겨있다고 배웠을 뿐만 아니라 국어시간에도 이 책이 국한문혼용체의 효시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배웠다.

하지만 교재 지문으로 책의 내용을 제안하신 선생님 덕분에 비로소 그 내용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하는 '개화의 등급'을 보면 유길준이 어떻게 개화를 정의하고 등급을 나누며, 우리 국민들에게 개화하는 태도에 있어서 노예가 되지 말고 개화의 주인이 되기를 권하고, 서양과 우리나라의 형편을 고려하여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개화를 해야 하는가를 역설하는지 알게 된다.

제목만 알면서 그 책을 아는 것으로 여겨온 다른 책들도 이제 하나씩 직접 읽어봐야겠다. 생각해보면 학습태도나 방법은 학교 다니는 동안 여러 시험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 유형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 것 같다.

한 예로 우리에게도 이제 꽤 알려진 프랑스의 대입자격시험 바깔로레아에서는 '역사는 반복되는가?', '예술적 감정과 종교적 감정의 차이와 공통점은 무엇인가?', '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등과 같은 삶의 근본 문제를 놓고 학생들이 4시간에 걸쳐 자신의 의견을 서술해야 한다.

작품의 제목과 연도를 답하는 것을 요구하는 문제에서는 공부도 그에 맞게 단편 지식을 외우는 선에서 끝나기 쉬울 수 있는 반면 바깔로레아와 같은 시험 유형에서는 학생들이 작품 제목이나 연도를 외우는 것만으로는 답을 쓰는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기의 의견을 전개시키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책 한권이라도 그 내용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정리해가는 훈련을 하게 된다.

요즘 우리 교육에서도 점점 강조되고 있는 논술이나 글쓰기도 아마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의 필요성을 절감한 데서 나온 시도라고 여겨진다.

물론 책 내용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한 채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깨달은 바가 삶에 녹아들지 않는다면 책을 읽더라도 책 제목만 아는 것과 다를 바 없겠지만, 이제껏 제목과 저자 이름만 외워온 많은 책들을 하나씩 직접 작품을 읽고, 책 안의 좋은 생각들을 내 것으로 소화해서 책 이름이 아니라 책을 아는 것이 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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