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9년 그러니까 제3공화국 시절 난 5급으로 공무원을 시작했다. 지금은 9급부터 시작하지만 그땐 5급 갑부터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공무원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정립도 되지 않은 나이에 시험을 봐 합격한 후 36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지나온 수많은 시간들이 영화의 한 자막 자막처럼 이어진다. 이런 공무원들의  꽃은 사무관이라고들 말한다.

오랜 기다림 끝에 지난달 나도 공무원의 꽃이 됐었다. 그 순간의 기분은 맏며느리로 시집와 딸을 낳고 아들을 낳았을 때 더 이상 자식을 안 낳아도 되는 해방감과 똑같았다. 더 이상 승진에 목말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행복했다. 행복한 이 마음을 제일 먼저 엄마에게 알렸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린다. 마음을 가다듬고 "엄마, 나 승진했어!" 멀리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도 떨렸다. "아이고 잘됐다, 잘됐어 축하 한다, 큰일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고맙다 큰애야" 하신다.

그 소리에 목이 잠긴다. 며칠 후 시골에 계신 동네 어르신들에게 점심을 대접했다. 동네 어른들은 다 모여야 30명이 채 안 된다. 노인정에 모이신 어르신들을 뵙고 인사를 드리니 모두들 내일같이 좋아하신다. 일일이 손을 잡아 드리고 포옹을 해 드렸다. 손은 거북이 등 같고, 허리는 굽어 엉거주춤한 모습에 가슴이 저렸다. 어릴 적 그 분들의 모습은 어디 가고 빈껍데기만 남아 있는 텅 빈 둥지 같았다.

허리 한번 펼 사이 없이 일을 해 자식들 키워내신 훈장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식사 전 간단한 인사 말씀을 드리고 나서 식사를 시작하려고 할 때, 우리 엄마가 일어서더니 이렇게 많이 오셔서 감사하다고 굽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신다. 평생 남 앞에서 말씀하시기를 꺼려하셨는데 오늘은 용기를 내신 것 같다. 올해가 팔순이신 우리엄마, 평생 7남매의 자식을 위해 헌신, 희생 하신 우리엄마가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 것 같다. 식사 후 노인정일동으로 승진을 축하한다는 난 화분을 주셨다.

가슴이 뭉클하다. 그 어느 축화화분과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그 것을 가슴에 폭 안았다. 이 자리에는 우리 큰엄마와 작은아버지, 작은엄마가 함께 했다. 엄마에게도 감사하지만 큰엄마와 작은 아버지께도 항상 감사하다. 큰엄마는 우리 집에 돈이 없어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있을 때 아버지를 설득해 오늘의 내가 있게 하셨다. 큰엄마가 아버지께  "서방님, 재 중학교 보내셔유, 일 년에 송아지 한 마리 낳는 거 없는 심치고 보내유"하셨다.

그 바람에 난 중학교를 2년이나 지난 후 입학하게 됐다. 그런 조카딸이 동장이 됐다고 좋아하시며 하얀 봉투를 내 주머니에 넣어 주셨다. 실랑이를 하다 집에 와서 봉투를 보니 "큰엄마가 ㅅ달 성공 축아"라고 쓰셨다. 비록 맞춤법은 틀렸지만 큰엄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날 저녁 우리 엄마가 다니시는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께 저녁식사를 대접해 드렸다. 여전히 엄마는 기분이 좋으셔서 연신 싱글벙글 하신다. 엄마가 기분 좋은 것, 그것이 나의 기쁨인 것을 나는 왜 진작 느끼지 못했을까!

/김복회 청주 용담명암산성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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