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 철학교수

[충청일보]천지간(天地間)에서 어우러지는 수많은 이치와 작용에서는 뜻하지 않는 기적보다도 자연계(自然界)의 순리(順理)가 우선해 작용을 하는 것처럼, 사람의 운명에서도 운성(運性)의 이치가 우선해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계의 근원(根源)이 생체기능에서 절대성을 지니는 것처럼, 운성의 이치가 운명에서 절대성을 지니고 공기가 천지 사방에 고루고루 널려서 육신의 생리 작용을 돕는 것처럼 운성(運性)도 천지간에 고루고루 널려서 사람의 운명(運命)을 돕는 것이다.
 

여기에서 공기는 육신(肉身)의 생체적 기능과 동화(同化)해 신체의 시발을 낳고 운성은 심리적 기능과 동화해 운명의 시발을 낳는 것이기 때문에 운성은 이치요, 비현실계(非現象界)의 세계가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치(理致)와 진리(眞理)를 깨닫는 것이 운성을 깨닫는 바탕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운명을 가늠 할 수가 있는 마음이 된다.
 

예컨대, 어떠한 법칙이나 정보가 과학적이고 정확성을 지녀야 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사고(思考)로 볼 때에 우주계(宇宙界)에서 일률적(一律的)이고 과학적이며 논리성(論理性)을 지닌 법칙만이 존재한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성(運性)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어떤 논리성과 법칙성을 가지고 접근하기가 매우 난해하다.
 

왜냐하면 운명(運命)은 이치(理致)가 현상계(現象界)에서 드러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자연계(自然界)의 3차원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고 이치(理致)는 이치에 따른 작용과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 안에서 머무는 마음과 영혼과 무념이 작용이나 활동을 할 때에는 자신 안에서 하나의 신기(神氣)가 동(動)을 하고 동(動)하는 신기(神氣)가 마음과 념(念)을 작용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은 어떤 과학적 법칙(法則)이나 합리적 논법(論法)에서 필요로 하는 증명이 불가능 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호흡이 공기를 받아 들여서 신체의 혈액을 원활히 하고 생명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운성(運性)을 받아 들여서 운명(運命)의 작용을 원만하게 하고 운(運)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 상태가 고요하고 맑아서 그 기능을 원활히 수행 할 수가 있을 때에 영혼도 그 기능을 원활히 수행을 하고, 무념(無念)도 그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오판을 막는데 도움을 주고 순간적인 착각을 막는데 도움을 주며 외부에서 오는 유혹을 뿌리 칠 수가 있는 마음의 힘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천지간(天地間)에는 복(福)됨도 있고 흉(凶)됨도 있겠지만, 그것들이 사람에 이르러서 운명(運命)에 관여 할 때는 머물만한 여건이 합당할 때에 합당한 여건에 맞춰서 흉(凶)이 올 수도 있고 복(福)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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