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앙사터ㆍ표훈사 등 골짜기마다 명찰흔적

▲지난달 28일부터 29일까지 금강군 금강산일대에서 열린 내금강 시범관광에서 절벽위에 지어진 국보급 유적 98호인 보덕암이 자태를 뽑내고 있다.

근대 고승으로 통합 전 조계종의 초대 종정을 지낸 한암(漢岩) 선사. 그는 22살 때인 1897년 금강산을 유람하던 중 기암절벽에 충격받아 삭발ㆍ출가한 스님으로 유명하다.

바위 하나하나가 부처와 보살의 얼굴을 닮은 것에 감격해 머리를 깎아버린 것이다. 내금강 장안사에서 가부좌를 튼 채 수도를 시작한 한암은 1899년 정암사 수도암에서 근대불교 선종의 중흥조인 경허(鏡虛) 선사로부터 '금강경' 사구게를 듣고 도를 깨쳤다.

금강산과 인연이 깊은 고승대덕은 한암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즉, 한국불교의 대표 성지 중 하나가 금강산이라는 뜻으로, 1000년 넘게 이어져온 법향은 골마다가득하다.

▲묘길상의 마애불상.
특히 이번에 관광이 허용된 내금강 지역은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 신계사 등 금강산 4대 명찰 가운데 신계사를 뺀 3개를 안고 있어 천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개방된 내금강엔 장안사터, 표훈사, 정양사, 백화암터, 마하연사터, 보덕암, 삼불암, 묘길상, 불지암 등 불교 흔적들이 골짜기를 가득 메운다. 자연이 빚어낸 절경과 인간이 창조해낸 자취들이 어우러져 천하명승지로써 탐승객들의 발길을 붙잡는 것이다.

금강산 4대 명찰 중 유일하게 전화를 조금이나마 피한 곳은 만폭동 어귀의 표훈사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 대사의 제자인 표훈(表訓) 선사가 창건한 이 사찰도 한국전쟁 때 일부 전각이 부서졌으나 중심법당인 반야보전을 비롯해 영산전,명부전, 칠성각, 능파루 등은 용케 화를 면했다.

웅장한 장경봉 아래에 있는 장안사터는 비록 전각은 사라지고 없지만 선종 제1사찰로 자부하던 옛 영화를 짐작하게 하기에 어렵지 않다.

'임제종제일가람'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던 장안사의 창건자는 고구려 승려로 신라에 귀순해 최초의 승통이 된 혜량(惠亮) 조사. 중수자는 신라 혜공왕 때의 진표(眞表) 율사로, 진표는 금강산에 발연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내금강 분설담.
또한 고려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懶翁) 선사와 근대불교의 대표적 학승인 한영(漢永) 스님 등이 참선 정진하며 법향을 흩날렸다. 표훈사를 지나 만나는 정양사에선 신라의 대표적 고승 원효(元曉) 대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금강산의 정맥에 자리잡아 볕 바른 곳'이라는 뜻의 '정양(正陽)'에서 유래한 이 사찰은 내금강의 40여 개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에 위치한다.

내금강의 압권이라면 만폭동 묘길상(妙吉祥)을 꼽아야 한다. 나옹 화상이 직접새긴 높이 15미터의 마애불로, 북한 국보 제46호다. 묘길상은 문수보살의 다른 이름.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국내 최대의 마애불상으로 부처의 손가락 하나가 보통 사람의 몸체보다 크다. 이 좌불상은 결가부좌 모습이며 오른손은 위로 쳐든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아래로 내린 여원인(與願印)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장안사에서 표훈사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삼불암도 탐승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마애불이다. 세모 뿔 모양의 이 거암의 앞면에는 현재, 과거, 미래의 구원을 상징하는 석가, 아미타, 미륵의 3부처 입상이 새겨졌고, 왼쪽 면에는 관음보살과 세지보살 입상, 뒷면에는 보살상 60여 구가 가지런히 조각돼 있다. 북한 보물 제41호.

삼불암이 지척인 백화암터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왜군을 물리쳤던 서산(西山) 대사가 머무른 곳이다. 청허당(淸虛堂) 휴정(休靜) 대사인 서산은 이 절에 오랫동안 주석해 '백화도인(白華道人)'으로 불렸다고 한다.

현재는 서산대사 부도비등 부도 7기와 비석 3기만이 빈 터를 지키고 있다. 이 절에는 서산대사와 사명당과같은 명승의 진영을 모신 수충영각(酬忠影閣)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

보덕암은 당나라 스님으로 고구려에서 활동했던 보덕(普德) 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구리 기둥 하나에 의지한 채 만폭동 분설담의 오른쪽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데, 그 모습이 매우 기묘해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낸다.

보덕 화상은 고구려 불교가 쇠퇴함을 개탄하고 백제로 건너가 경복사를 짓는 등 부흥활동을 편 스님으로, 신라 열반종의 개조이기도 하다.

한편, 민통선 안에 있어 여전히 미공개 지역으로 남은 유점사에도 이름만 대면금방 알 수 있는 큰스님들이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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