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지만 잘하면 대학가게 하겠다’고 공언한 정치가가 교육부장관이 되었고, 힘들게 공부하지 않아도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다고 믿은 학생들은 학력저하문제로 대학에 들어가서 대학강의를 이해하기 위한 보충강의를 들어야하는 수모를 겪었다. 수능영어를 개혁하겠다고 공언한 정치인은 교육부장관이 되어 수백억원을 투입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지금은 인터넷 검색란에만 존재하는 유명무실한 시험으로 전락했다. 두발자유, 복장자유, 학생인권을 외치는 많은 사람들이 교육정책의 일선에 서서 조례를 만들고 규칙을 만들어 학생들과 일선에서 대면교육을 하는 선생님들의 손발을 꽁꽁 묶어 놓고, 오늘날 ‘인성교육’을 외치지만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2014년4월16일은 어쩌면 한국의 두 번째 국치일(國恥日)에 해당되지 않을까. 학생과 교사 등 9명의 실종자를 끝내 찾지 못한 채 295명의 초유의 사망자를 낸 세월호 사건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부정과 부패, 실종된 배려심과 책임감 등의 총체적 사회안전망의 부실이 부른 인재(人災)라 할 수 있다. 채 피우지 못한 채 승화한 250명의 꽃다운 청춘을 향해 기성세대의 통렬한 반성은 물론 ‘배려’보다는 경쟁을 통한 서바이벌만을 강조한 교육의 총체적인 오류를 통감(痛感)해야 할 것이다.

영어로는 character 또는 personality로 번역되는 ‘인성(人性)’이란 ‘사람의 성품, 각 개인이 가지는 사고와 태도 및 행동 특성’으로 정의한다. 인성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세월호 사건이후 실종된 인성을 찾기 위해 정치인들은 세계 어느나라에도 없는 ‘인성교육 진흥법’이라는 법률을 제정했다. 교육부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올 7월부터 전국 초/중/고에서 인성교육을 의무화하고, 교사들에게 인성교육 연수를 의무화한다고 한다.

다시 물어야 겠다. ‘인성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인성을 학교에서 의무교육한다고 단어 외우듯이 외우고 시험을 친다고 길러지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진정한 인성’은 ‘엄마의 품’에서 시작한다. 어쩌면 아이를 잉태한 순간부터 엄마가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아이와 함께하는 시점과 판단이, 모두 아이에게 투영되어 ‘인성’이 싹 트고 아이에게 내재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생성, 발전된다.

 

훈육(訓育)이라는 단어가 매우 낮설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영어로는 discipline 또는 education으로 번역되는 이 말은, 훈(訓)은 ‘가르친다’는 의미이고 육(育)은 ‘길러낸다’는 의미이므로, 결국은 ‘가르쳐서 길러낸다’는 의미를 갖는다.

‘교육’이라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사람은 훈육을 거쳐 교육의 단계로 이행된다고 말한다. 훈육이라는 단어에 가르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흑과 백으로 명확하게 경계선을 그을 수는 없지만, 작게 생각해 보면 훈육은 가정, 그리고 부모를 떠올릴 수 있다. 말하자면, 훈육은 ‘밥상머리’에서 시작된다고 하겠다. 그래서 교육자들은 흔히 ‘모든 교육의 시작은 밥상머리에서 시작된다’고 지적한다.

조심해야 할 것은, 훈육이란 ‘심리적인 구속으로, 규칙과 처벌을 통해 행동을 통제하는 것을 의미’하고, 처벌은 육체적인 고통이나 심리적인 수치심을 부여하거나 물리적으로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헐리우드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외출금지’나 일본인들이 식당에 가면 아이들이 함부로 뛰어다니지 못하도록 구석자리를 잡아 아이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것도 이런 훈육차원으로 볼 수 있다. 혹자는 종종 분재(盆栽)를 교육에 비유하기도 한다. 자연 속에서 비바람을 맞으면서 제멋대로 휘어지고 비틀려서는 재목(材木)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잡목(雜木)으로밖에 자리지 못하기 때문에 어린 나무일 때부터 형태와 성질을 잡아줌(교육)으로서 그 존재가치를 향상시킨다고 믿는 까닭이다.

교육은 훈육과 함께 가는 것이지만, 교육의 장(학교)에서는 훈육을 담기가 어렵다. 훈육에는 밥상머리에서만이 가능한, 부모와 가정에서만 가능한 통제의 수단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사부일체의 개념이 철저했던 시절에는 서당의 훈장님이 훈육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인성교육도 배려심교육도 학교에만 책임을 전가해서는 그저 정치인들의 헛된 구호로 그칠 것은 지극히 자명한 사실이다.

 

제2의 국치일 같은 세월호의 참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교육과 훈육을 남에게 미루기보다, 모두의 가정에서 밥상머리교육을 통한 ‘인성과 배려’라는 키워드를 공유하는 것이 절실한 오늘이다.

 

/안용주 선문대 국제레저관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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