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 희뿌연 대기를 헤치고 봄볕이 다가온다. 1500여년을 거슬러 신라인의 숨결이 흐르는 역사의 현장에 섰다. 보은삼년산성이다. 470년 신라 마립자비왕 때 축조된 최고의 돌성으로 꼽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년에 걸쳐 3000여명의 힘으로 이뤄낸 산성이라고 해 '삼년산성'이라 불리며 보은의 사적으로 가치가 주목되고 있다. 해발 325m 오정산, 산성에 오르니 시내가 한눈에 훤히 내려다보인다. 성벽의 높이가 그만큼 깊은 게다. 난공불락 천혜의 요새임이 실감난다.
 

해설을 맡아주신 선생님은 진천출생 김유신장군의 조부 김무력장군이 한때 이곳에 머물며 백제를 물리친 이야기를 곁들인다. 김유신장군이 삼한을 통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 삼년산성을 전초기지로, 백여 차례 넘는 전투에서 굳건히 신라를 지켜냈기 때문이라며 진천과 연이 닿아 있음을 들춘다. 잎 떨군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난 성벽의 위용은 적에게 한 치의 침범도 하락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공고해 보인다. 납작한 점판암질 판돌을 깎아지른 듯 십 수 미터 켜켜이 쌓아올린 축성기법에 기가 눌린다.
 

외교에 귀재라 할 태종 무열왕이 나당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웅진도독부로 오게 된 당나라의 왕문도를 맞은 곳이 바로 삼년산성이다. 당시 신라의 수도가 아닌 이 산성에서 왕문도를 맞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서문지로 들어서니 남쪽으로 뻗은 성벽이 검은빛의 아랫돌과 위쪽 흰색 화강암이 금을 그은 듯 확연히 양분돼 보인다. 장대한 성벽도 세월의 무게는 어쩌지 못했는지, 일부가 허물어져 보수한 흔적이다. 옛것을 보수, 복원할 경우 원형질에 닿아야만 그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 이치가 무산된 현장을 본다. 성벽 위로 올라섰다. 8m 남짓 넓이는 바로 성벽의 두께를 말한다. 과연 적이 뚫을 수 없는 철옹성이다.
 

산릉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1680m의 성곽은 자연지형에 따라 성벽의 높이가 각기 다르고 곳곳에 치성이 돋보인다. 남문과 북문 방향 두 곳에 곡성을 이룬 모습은 양쪽에서 적을 집중 공략할 수 있는 과학성에 아름다움을 더했다. 골짜기를 싸안은 성곽 안의 연못 '아미지(蛾眉池)' 역시 해자의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게 돼 있다. 그 옛날 삼국시대 하나의 성을 쌓는 데에도 이렇듯 자연 그대로의 지형을 살리면서 과학적이고도 아름다움을 고려한 점을 보면 숙연해 지지 않을 수 없다. 변변한 장비도 없이 사람의 손으로 견고한 성벽을 순전히 돌로만 쌓아 만든 '삼년산성'이 그 오랜 세월을 견뎌 온 것은 자연의 결대로 정성을 들인 때문이다.
 

보수나 복원 역시 그 이상의 공을 들어야만 문화유산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으리라. 삼년산성이야말로 발견하게 된 근원이 자연 그대로의 지형을 따라 이뤄진 성곽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쌓은 성벽이지만 그 자체가 자연과 조화로운 최고의 예술품이다. 이러한 예술품이 원형으로부터 벗어나 생뚱맞게 화강암으로 보수한 것으로 인해 품격이 떨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석축 위쪽 일부는 시멘트까지 덧칠이 되었으니 ….  천천히 본연의 모습을 들어다 보고 그 본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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