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틈에 나무야, 그토록이나 야위었느냐! 애초에 좋은 곳에다 종자(種子)를 심어두고 기다린들 그대의 서러움이 이리 하리까를 생각케 하노라.

심어야 할 곳에 심어야 한다는 것은 사람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심어야 할 것을 심었을 때 마음에서는 편안을 거두고 생각에서도 결실을 거두는 것이다.

그러나 가는 세월을 망각한 채로 방황의 늪에서 오랜 시간을 허비하다 보면 자신의 궤도에서 이미 멀어져 버린 자신을 보게 된다.

이때 느끼는 스스로의 좌절감은 무력증을 낳고 이러한 무력증에서 다시 방황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래서 심을만한 마음에 심어야 할 것을 반드시 심었을 때 내 안에서 도둑이 들지를 않는 것처럼 머물만한 곳에서 머물고 만날만한 사람을 만나며 할 만한 일을 행할 때에 비로소 수확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운명(運命)으로 태어났을지라도 왕후장상이 될 만한 곳을 만나지 못하고, 왕후장상을 가르칠만한 스승을 만나지 못하며 왕후장상이 될 만한 지혜와 행실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왕후장상의 제목일지라도 그 결실(結實)이 없다.

마치 태어나기는 커다란 소나무에서 생겨났을지라도 바위 틈바구니에서 자리를 잡은 송(松)씨처럼 고달품은 끝이 없고 바람은 멈출 날이 없으며 위태하기가 그지없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욕심(慾心)은 많고 지혜로움이 없는 사람이라면 마음은 한없이 애처롭고 생각을 끝없는 방황으로 지쳐 갈 것이다.

급기야 친구들은 그를 떠나가고 가족들도 제각각의 보따리를 따라서 떠나간다. 그래서 동남 방향에서 귀인(貴人)이 찾아올지라도 자신은 서북방향으로 달리기만 할 뿐이지 귀인을 끝내 만나지 못한 채 엇갈린 인생 열차에서 자신의 지쳐가는 육신과 메말라 가는 영혼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니 귀인이 오는 곳으로 생각과 마음을 줘야 한다. 귀인이 온다는 것은 사람마다 제각각의 운성(運性)을 따르는 것이니 설혹 천금의 조언을 들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이 헛된 것에 쏠려 있다면 그는 그것을 볼 수가 없고 또 신령스러운 조화를 봤더라도 자신의 마음이 헛된 것에 빠져있다면 그 조화로움을 끝내 볼 수가 없을 것이며 신령스러운 기운이 찾아오더라도 자신의 생각이 사(邪)된 곳에 머물러 있다면 참다움을 보고 오히려 화를 낼 터니 오래 머물러 있겠는가?

그리고 사람의 인연도 제각각의 성정에 따르는 것이다. 자신의 성정(性情)이 거친 사람이라면 거친 성정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감응(感應)의 조화요, 자신의 성정이 온화한 사람이라면 온화한 성정의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감응(感應)의 조화가 된다.

이와 같이 감응의 법칙에 따라 비슷한 기운의 사람들끼리 조화로움을 갖는 것은 천지간의 순리가 되기 때문에 자신의 성정(性情)이 어떠하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알맞은 새로운 인연(因緣)이 생겨나고 그때 맺어지는 인연에 따라서 운성이 함께 어울리는 것도 이치(理致)가 되는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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