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자 수필가] 봄꽃은 저온 환경을 꿋꿋이 견뎌내고 피는 꽃이다. 낮이 길 때 피는 장일식물이며 꽃이 진 후에야 잎이 난다. 겨우내 죽은 듯 서 있는 나무로 보였지만 사실은 주변을 살피고 수많은 물질을 만들며 봄이 되면 개화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까.


 봄에 피는 꽃은 대부분 혼자서 피지 않는다. 매화가 그렇고 산수유꽃이 그렇다. 개나리꽃도 진달래꽃도 모두 무더기로 피어난다. 긴 겨울 추위와 삭풍을 함께하며 서로 의지하고 살았기에 슬픔뿐 아니라 기쁨도 함께하고 싶어 그렇게 피는 것은 아닐까.


 고통을 함께해본 이들은 안다. 곁에 누군가가 있어 나의 아픈 마음을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 가를. 그렇게 함께 견디며 살아온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과는 먼 길을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을.


 주말 내내 비가 내렸다. 만개한 벚꽃은 온통 빗물에 젖어 있었지만 그런데도 꽃을 즐기려는 상춘객은 밖으로 쏟아져 나와 길을 메우고 있었다.


 긴 겨울의 고난을 딛고 화사하게 모습을 드러낸 꽃을 통해 상처 나고 아픈 영혼을 위로받고 싶은 군상으로 보였다. 풋풋한 십 대의 소년 소녀들처럼 막 피기 시작한 꽃이 행여 모진 비바람에 맥없이 스러지면 어쩌나 걱정이 돼 일부로 길 메우는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대청댐 가는 길과 무심천 언저리의 벚꽃은 꿋꿋하게 잘 버티고 있었다. 간혹 고인 빗물에 몇 닢의 꽃잎이 동동 떠 있었으나 그쯤은 빗물도 호사를 누릴 권한은 있지 않을까.


 세월은 흘러 해가 바뀌었고 봄이 되니 예외 없이 차례대로 꽃이 피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예년에 비해 며칠 이르게 개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자연의 섭리는 늘 변함이 없다. 십여 일 후면 다시 4월 16일이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지난해 그날 일어난 세월호 참사를 말할 것이며 구구절절 말 홍수가 터질 것이다.


 아직도 깊은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세월이란 글자는 슬픔이고 고통이며 절망 자체다.


 하지만 그 어떤 슬픔도 그것을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 낼 수 있다는 말처럼 우리는 그 날을 꼭 이야기해야만 한다.

아기가 울음으로 자기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을 시끄럽다고 일축하는 어른이 아니면 좋겠다. 잠시 투덜거렸다고 소중하게 마음으로 간직하는 내 사람들이 이를 불만으로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에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국민을 누르려고만 하는 정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말로는 소통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실천하지 않는 소통의 부재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묘사한 시인에게 정당함을 가져다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중 방황을 마치고 즐겨가는 꽃집에서 무더기로 피는 후리지아꽃 한 다발을 샀다.

종일 꽃 멀미가 날 정도로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꽃이 그리웠다. 누군가와 투닥거렸을 때, 마음이 곤궁할 때, 사는 일이 절벽 같을 때, 곁에 꽃을 두는 것이 이제는 습관이 돼버렸다. 향이 다하고 마를 무렵이면 후리지아꽃을 벽에 거꾸로 매달아 둘 것이다.


 바닥을 향한 마른 꽃송이를 보면서 입장 바꾸기, 뒤집어 생각하기를 해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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