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간에서 기운(氣運)이 교류(交流)할 때에는 그 기운도 정(正)을 따라서 흐르게 된다. 이때 하늘의 기운은 일정한 장소를 가리지 않지만 땅의 기운은 지리(地理)를 분명히 하기 때문에 천지간의 기운들이 융화하면서 만물의 생육(生育)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만드는 것 중에서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고 사람의 힘 가운데에서 인화보다도 더 큰 것은 없다. 그래서 국가는 지리(地理)를 닮아서 그 자리가 일정하고 인화는 이치(理致)를 닮아서 그 자리가 일정하지 않다.
 

즉, 땅에는 지리가 있고 나라에는 자리가 있으며 하늘에는 이치가 있고 인화(人和)에는 섭리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의 강물처럼 형성 할 때를 인화(人和)라고 한다. 그래서 인화 속에는 너와 내가 존재를 하고 우리가 존재를 하며 이치가 존재를 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치가 사람들 모두에게 머물면 인화(人和)가 되고 내 안에서 머물 때에는 정념(正念)과 정심(正心)이 된다.
 

그리고 정념과 정심이 내 안에서 하나가 될 때에 경(敬)이라 이름을 하고 이러한 경이 자신에서 머물 때에 자신의 길은 저절로 열리고 자신의 앞날에서는 훈풍이 불어오며 어떤 난관에서도 헤쳐 나갈 수가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 세상의 일에서 판단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은 언제 할 것인가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구분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정심(正心)을 어떻게 유지하고 언행을 어떻게 세울 것이냐 와도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언(言)이 불손하고 행실만이 겸손하면 그가 심어야 할 땅이 없는 것과도 같고 행(行)이 불손하고 언변만이 겸손하면 그가 심었을지라도 결실을 거둘 수가 없는 사람과도 같기 때문에 언(言)과 행(行)이 모두가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명분(名分)은 잘 달궈 쇠에다가 담금질을 하는 것과도 같아야 하고 잘 만들어진 상품을 포장하는 것과도 같아야 한다. 마치 의로운 선비가 심산유곡에서 은자 생활을 하고 정의로운 선비가 진세(塵世)에서 온갖 시련과 부딪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킬 때에 은은히 풍겨오는 향기와도 같은 것이 명분이다.
 

하지만 명분(名分)을 얼핏 생각하기에는 드러나는 모양만을 말하는 것처럼 이해를 할 수도 있겠지만 명분 속에서 알맹이가 없다는 것은 허세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진실이 없다는 것은 허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명분은 안에서 풍기는 향기와도 같은 것이고 화려하지 않은 은자의 생활처럼 은은한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명분이 있을 때에는 그것이 멀리에 있고 높은 곳에 있으며 깊은 곳에 있더라도 사람들이 줄을 이으며 모여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천지간에는 인화(人和)의 기운이 존재하고 인화 속에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흐른다.
 

그리고 신령스러운 기운은 정(正)과 함께 흐르는 기운이기 때문에 정(正)이 흐르는 곳에서 자라나는 겸(謙)은 강물에서 노니는 물고기와도 같다. 이때에 자신의 존재가 겸한 자세로 머물러 있을 때에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자신의 존재에게 힘이 되고 자신의 성장을 돕는 것이다. 이것을 운명(運命)이 좋아지는 이유라고 한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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