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대로 1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단명했던 수상이 많은 가운데 한국인의 가슴에 이 만큼 오욕으로 점철된 아픔을 선사(?)하면서 보기 드물게 장수하고 있는 아베 신조(安部晋三)수상은 어떤 사람일까? 그의 집안은 대대로 정치가 가문으로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제56/57대 총리)는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 넣고 위안부 및 강제노동 등 한국인에게 피할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도조히데키(東條英機)내각의 상공부장관으로 활동하여 결국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전범의 피의자가 됐던 인물이다. 1964년부터 제61/62/63대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는 외조부인 기시노부스케의 동생으로, 한일청구권을 통해 한일간의 갈등사안인 한일기본조약(1965년)을 맺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베 수상은 A급전범에 대한 전쟁책임을 묻는 질문에 “당시 지도자였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보다 엄중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책임의 주체가 어디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부로서 그것을 판단할 입장이 아니다”며, 동경재판에 대해서는 “전쟁의 총괄은 일본인 자신의 손이 아닌, 말하자면 연합국측의 승자 판단에 의해서 단죄되었다”고 말해 마치 전쟁의 책임이 승자에 의해 왜곡된 것처럼 묘사했다. 일본의 제1당인 자민당 간사장 대리시절(2005.3.27.)에는 「従軍慰安婦は作られた話(종군위안부는 날조된 이야기)」라고 강연하기도 했다.

한국인의 일본관은 어떤 것일까? 단정지어 말하기 전에 우리가 단죄했던 일본 역사 속의 인물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왕조실록(선조24년,1591)에 적시된 조선사신의 묘사에 따르면, “秀吉容貌矮陋(수길용모왜소) 面色皺黑(면색추흑) 如猱玃狀(여노확상)”이라 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하고 한반도를 유린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그 외모의 작고 초라함만을 기록으로 남겨놓고 있다. 일본의 개국과 근대화는 한국보다 상당히 앞선1854년에 이루어졌다. 한국은 이보다 20여년 늦은 1876년, 우리가 배우는 강화도조약(朝日修好條約)을 통해서다. 일본은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정하고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征韓論(정한론)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하고, 이를 부추긴 사람으로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를 지목한다. 안중근 의사의 손에 처형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초대 조선총독부통감으로서 조선말살을 진두지휘한 원흉 그 외는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일본인관이었고, 사실은 그 이상을 바라보려고 하는 시도는 몇몇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통설이 진실인 것으로 통용되고 전승되었고, 이러한 판단은 수 백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인을 판단하는 하나의 척도로 사용되어 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일본인이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와는 사뭇 달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천민으로 태어나 천황조차 필요여부에 따라 갈아치우고 아무도 이룩하지 못했던 일본 전국을 최초로 통일시킨 영웅으로 생각한다. 사이고 타카모리는 시골 사츠마번(薩摩潘)에서 태어났지만 유신(維新)3걸로 손꼽히고 일본을 근대화 시킨 선각자로 평가받는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사상가로서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으로부터 이름을 받고 대일본제국헌법의 기초를 닦았으며 초대와 제5/7/10대의 내각총리대신, 초대추밀원의장, 초대귀족원의장을 지낸 걸출한 인재로 평가받고 있다.

 

/안용주 선문대 국제레저관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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