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허파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보훈의 성지이고 민족의 성역인 유성구 갑동에 소재한 국립 대전 현충원을 떠난 지 거의 7개월이 다된다.
우리 보훈처 내부 이야기지만 작년 8월 중반에 대전 현충원 으로 인사 명령을 느닷없이 받았을 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런 인사를 당했다면 생에 대한 회의로 까지 연결될 수 있었다.
그래도 다 내 부덕의 소치이고 내 책임이려니 하면서 누구에게 한마디 불평하지 않고서 명령 일자인 8월 16일 목요일에 단 한순간의 지체 없이 잰걸음으로 현충원으로 달려 왔다.
공직 생활을 하다 보면 순환 보직을 피할 수 없는 마당에 현충원에서 근무기간은 7개월 반 밖에 되지 않아서 한 자리로는 비교적 짧은 기간이지만 좌고우면하지 않고서 보훈정신을 배양할 수 있는 계기라는 신념 아래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아 왔다.
첫째로 대전 현충원의 기관장인 이용원 원장님의 후덕한 배려 속에서 지낼 수 있었음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다.
고참 중에도 왕고참인 나를 참모로 둔다는 것은 보통 껄끄러워 여러 말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원장님의 폭 넓은 이해 속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절대 청렴한 기조의 청백리의 표상인 이 원장님과는 여러 면에서 공감하는 바가 있었던 점은 또 다른 행복이었다.
둘째로 아무리 환경이 바뀌었다고 하여서 나의 신조인 보훈정신과는 유리될 수 없는 것이기에 현충원에 근무하는 것도 보훈의 외연을 확대하고 보훈정신 배양을 위한 유익한 계기로 삼으려고 노력하였다.
외부에서는 거의 인식을 못하지만 현충원은 설립 당시인 1979년부터 국방부 소관으로 있다가 2006년 1월 30일부터 우리 보훈처로 이관되었기에 아직도 보훈에 충분히 접목되기까지에는 시간이 더 필요한 실정이다. 이 원장님의 작품인 산책길과 차량 서비스 명칭에 보훈을 붙인 것도 보훈을 널리 알리려는 조그마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셋째로 불과 반년 조금 넘은 재임 중에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을 남길 수 있었다.
현충원의 가장 명소인 현충지의 전면에 큰 폭포가 있는 데 바로 옆에 현충지 오른쪽 개울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이용하여 미니 폭포를 만들도록 했는데 어느 새 직원들이 권율정 폭포라고 부르고 있다. 사실은 원장님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현충원의 대표적 상징은 당연히 현충탑이다. 현충탑을 안내하는 표지석을 작년 연말에 설치하였는데 그간 20년 가까이 여분으로 아끼던 화강암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돌은 현충원 설립 초기에 강원도 영월군 직동면 에서 가져온 것으로 검지 손가락 모양을 가져서 제 자리를 잡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다른 의미 깊은 일은 현충원의 여러 안내판의 영문 표기 내용의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었던 점과 호국분수탑·홍살문·천마웅비상·고인돌 등은 영문 내용을 추가한 점이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일은 장군2묘역으로 가는 길에 공터 화단이 있는데 현충원 장비고 위에 임시로 식재된 향나무 22그루를 심도록 하였다. 그것은 대전지방보훈청장으로 인사 명령 받기 하루 전에 이루어져서 지금도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현실적으로 이러한 일들은 참모로서 하기에는 우리 행정 구조와 실정상 어폐가 있는 부분이다. 그렇게 하기까지에는 당연히 기관장인 원장님의 이해와 배려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넷째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현충원을 떠났지만 아직도 마음은 항상 제3자적 관점이 아닌 우리 현충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 와서도 현충원에 들른 횟수만 130여 번이 넘을 것이다. 한동안은 거의 매일 아침에 들른 후에 사무실에 출근한 일도 있었다. 지금도 마음의 정리가 필요할 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면 새벽 같이 들러서 마음을 가다듬곤 한다.
공직 속성상 한번 떠나면 다시 그곳에 가기가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고 껄끄럽다는 점을 알면서도 현충원을 향해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발길을 옮기는 것은 숭고한 분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나 역시 보훈에 대한 열정 이외에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현충원을 떠나면서 "그동안 행복했었습니다." 라고 고백 하고 싶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