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저녁을 먹고 도착한 세금천은 서서히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유장하게 흐르던 냇물이 소쿠라지듯 요란한 소리를 낸다. 한여름 밤, 달빛 아래 초평호반 초롱길을 걷자는 계획이 무너지는 소리다.

돌다리는 밤새 내린 빗물에 온몸이 잠겨 허우적대며 새까매진 등 거죽을 드러낸 채, 여울지는 황톳물을 튕겨내고 있다.

평소 성긴 듯 무던해 보이던 다리가 오늘은 호락호락 길을 내줄 것 같지 않다. 호기 있게 밤길을 나섰던 배짱이 주춤해진다.

만삭의 몸이 된 열나흘 달빛은 유유히 농다리를 건너 저만치 앞서 길을 밝히고 있다.

일행은 다리 위로 한 발도 내딛질 못하고 주변을 맴돌 뿐, 자연 앞에 맞설 수 없는 작은 존재임을 실감하고 있다.

여름이면 몇 차례씩 폭풍우를 겪어내면서도 1000년 세월을 견뎌온 돌다리의 저력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유유하게 흐르든, 소쿠라지든 물살을 거스르지 않는다.

결의 흐름을 좆아 구불구불 몸의 형태를 구부리고 있다.

제각각 생긴, 크고 작은 돌들을 다독이며 모난 각을 궁굴려온 것도, 여기저기 빈틈을 보이는 성긴 다릿발도 물의 흐름이 쉽도록 하기 위한 배려가 우선했음을 알 수 있다.

어쭙잖은 자존심을 내세우며 시멘트나 현대문명의 이기로 빈틈없이 싸 바르고 완벽한 듯 꼿꼿한 자세로 맞섰다면 벌써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다리 옆에 벌렁 자빠진 형태로 살아가는 버드나무만 봐도 그 이치를 읽을 수 있다.

농다리 근처에는 양옆으로 버드나무가 하나씩 서 있을 뿐, 그늘을 드리울만한 큰 나무가 없다.

그러니 그곳에 번듯하게 서 있던 그 버드나무는 오죽 의기양양, 호기롭게 살아갔을 것인가.

그러던 어느 날, 황톳물 넘실거리는 그 물가에서 굽힐 줄 모르고 물길에 맞서다가 결국 뿌리째 뽑혀 쓰러지고 만 것이리라.

세상 이치를 거스른데 대한 준엄한 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랜 세월 함께 해온 세금천 물살은 그를 보듬어 다시 생명을 이어가도록 손을 잡아 줬다.

위로 향하던 뿌리는 뒤두러져 있지만 땅에 닿았던 뿌리는 땅 속으로 더 깊이 뿌리를 내리며 힘겹게 생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세상 이치에 대한 깨우침을 호되게 체험한 버드나무도 점점 농다리의 삶을 닮아가나 보다.

'강함은 부드러움을 결코 이기지 못함'을 온몸으로 증명이라도 하듯 지금 겸손하게 몸을 굽힌 자세로 사람들에게 그늘을 드리워 주고 있다.

휘어진 몸통을 타고 오르는 사람들도 편안하게 받아주고, 잔가지를 늘어뜨려 멋진 배경이 돼주는 배려도 아끼지 않는다.

부드럽게 마음을 열고 받아주는 버드나무가 오늘따라 정겹다.

오가는 마음이 통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열나흘 달빛이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끼어들어 운치를 돋우고 있다.

달빛과 돌다리 그리고 버드나무와 사람이 어우러진  여름밤이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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