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영 서원대 교수] 지난 일요일 우연히 튼 TV에서 영화 '유브 갓 메일'(1998)이 하고 있었다. 주인공 조 팍스와 캐슬린 켈리가 이메일과 채팅을 하는 놀랍도록 두꺼운 초창기 노트북을 보니 새삼 신기해 보였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이메일을 소통하는 두 남녀가 사실은 뉴욕 골목 '길모퉁이서점' 여주인과 길 건너편에 새로 들어올 대형할인 서점 '팍스북스' 사장이었다.

조의 대형서점으로 인해 서점 문을 닫게 된 캐슬린은 그와 원수처럼 지내게 되는데, 캐슬린이 자신의 메일 상대임을 먼저 알게 된 조는 그녀에게 메일 상대인 것을 알리지 않고 자신을 거부하는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가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얻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을 밝히고 사랑을 이루게 된다. 그 바람에 대형서점의 동네 서점 잠식의 문제가 그만 로맨틱 코미디에 덮여 버렸다. 캐슬린과 조의 해피엔딩은 좋다.

하지만 캐슬린이 읽고 또 읽는 '오만과 편견'으로 마치 캐슬린이 조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엘리자베스가 다아시를 오해하다가 그의 진면목을 알고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정당화하면서, '팍스북스'가 삼켜버린 수많은 동네 서점에 대해서는 흐지부지하게 얼버무리는 것 같아, 로맨틱 코미디로 덮어버린 '팍스북스'가 상징하는 거대 자본의 폭력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은 것 같다.

자신을 거부하는 캐슬린에 다가가 차츰차츰 그를 완전히 사랑하게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조처럼 안락한 의자, 대폭 할인된 가격, 고급 커피, 작은 동네 서점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여건들로 '팍스북스'가 훔친 것은 시위나 항의, 갖가지 규제로 막을 수 없는 다름 아닌 사람들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팍스북스' 쇼핑백을 하나씩 들고 '길모퉁이서점'을 지나치는 사람들이나 출판기념회 장소를 '길모퉁이서점'에서 '팍스북스'로 슬쩍 옮긴 작가의 모습 속에 퇴근 때마다 들리곤 했던 길 건너 동네 슈퍼에서 아파트 입구에 기업형 슈퍼마켓(SSM)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는 내가 있는 것 같아 '팍스북스'를 향하려던 나의 날선 시선이 거둬진다.

변화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을 거스를 수도 없는 것도 알지만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아프다며 울먹이던 캐슬린의 떨리는 목소리가 아침 6시부터 불을 밝히고 문을 여는 길 건너 동네 슈퍼를 애써 외면하며 집 앞 SSM으로 향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변화라고 스스로 변명하고 싶어 하는 나의 양심에도 잠잠히 울려온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