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부추가 하얗게 꽃을 피워냈다. 방울방울 눈물처럼 맺은 꽃송이가 별꽃처럼 처연해 보이는 건 '무한한 슬픔'이라 전해오는 꽃말 때문만은 아니다.

한없이 내주기만 하는 그의 일생이 우리네 어머니의 삶을 닮은 까닭이다. 첫새벽 정화수 떠놓고 치성 드리듯 언 땅 헤집고 나온 것이 그렇고, 찜통더위에도 녹아내리지 않고 생생히 자신을 지탱해 온 강인함이 그렇다.

부추는 이른 봄부터 어느 푸성귀보다 일찍 싹을 내밀고 나온다. 소소리바람에도 꿋꿋이 여린 햇살을 끌어당겨 잎을 키우면서도 대를 세우지 않고 늘 부드러운 잎을 내준다. 한 뼘 정도 자라기가 무섭게 밑동까지 모조리 잘라 내기를 수차례, 참으로 야멸차게 칼질을 해댔다.

파란만장한 생이다. 된장찌개를 끓일 때 한 움큼 베어다 넣으면 풍미를 더한다. 멸치 액젓에 새큼 달큼 무친 부추김치는 나른한 봄 입맛을 돋운다. 어느 때는 새빨간 고춧가루와 범벅이 돼 오이소박이 속에 박혀들기도 하고, 삼겹살 구이의 맛을 살려주는 뒷배가 되기도 한다. 부추 전으로 이용될 때는 그래도 양반이다. 만들어진 모양새가 눈 맛을 살리고, 담기는 그릇이 우선 보기 좋은 접시거나 예쁘장한 채반에 올라앉을 수 있으니 폼이 난다.

가장 흉한 모습은 한여름 펄펄 끓는 보신탕 속에 빠져 후줄근한 몰골이 돼 늘어져 있는 일이다. 때로는 난도질당한 채 간장종지에서 숨을 죽이는 경우도 있다. 늘 누군가를 위해 보조적인 역할로서의 삶이다. 그렇다고 효능이 떨어지는 건 결코 아니다.

우리 몸속 요소요소에서 이로운 작용은 도맡아 하고 있다. 칼슘, 철분, 카로틴과 각종 비타민이 함유돼 있고 영양소의 흡수를 돕는다. 이러한 성분들은 피를 맑게 하고, 몸이 찬 사람은 따뜻하게 품어준다. 장을 튼튼하게 해 소화를 돕기도 한다. 허약체질, 간 기능 개선, 강장 효과 등 크고 작은 효능을 꼽자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그러면서도 두드러지게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자족할 줄 안다.

베어내고 베어내도 늘 그만큼 여린 잎을 너풀너풀 키워내는 것을 보면 속이 없는 건지, 어쩔 수 없는 삶을 순명으로 받아들인 지혜인지 모르겠다.

조석으로 건들마에 찬기가 스며들기 시작한다. 새하얗던 별꽃이 파르스름해졌다. 씨방이 점점 커지면서 하얀 꽃잎이 스러져가는 까닭이다.

찬 서리 내리기 전에 까맣게 씨를 영글게 하려는 듯 한낮 따가운 햇볕을 한껏 끌어 모으느라 기진해진 꽃잎은 늙어가는 어머니의 낯빛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결 따라 흔들리며 온몸 내어주는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 그녀인들 왜 당당하게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도도하고 아름다운 꽃을 화려하게 피우고 싶지 않았겠는가.

베이고 뜯기면서도 늘 부드럽기만 하던 부추 잎 사이로 꼿꼿하게 꽃대를 밀어 올려 찬연히 꽃을 피워낸 건 모성본능이다.

꽃대와 씨방의 내면은 강한 제 본향을 지녔으면서 그를 딛고 피운 하얀 꽃잎에서는 부추 향이 아닌 달큼한 꽃향기가 은은하다. 자손 번성을 위한 모성의 필사적인 향취이다.

오롯이 피어있는 한 송이 부추 꽃,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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