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토기(土氣)는 운성(運性)에서 무념(無念)에 비유하고 수기(水氣)는 발념(發念)에 비유하며 목기(木氣)는 정념(正念)에 비유하고 새로운 생명(生命)은 경(敬)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맑은 무념(無念)에서 하나의 생각이 생겼을 때에 그것을 가다듬어 정념(正念)에 이르고 정념은 다시 경(敬)한 생각과 마음으로 승화를 한다.

모든 이치(理致)가 그러하듯 이치가 이치로써 존재(存在)하는 것은 그 이치가 존재하는 장소와 이유와 가치가 있었을 때에 비로소 존재의 이치가 되는 것이다. 토기(土氣)는 만물(萬物) 가운데에서 존재의 마땅함이 되고 수기(水氣)는 존재의 이유가 되며 목기(木氣)는 존재의 가치가 된다. 그래서 하나의 가치가 생겨날 때에는 거기에 합당한 이유가 존재하고 합당한 자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토기(土氣) 가운데에서 수기(水氣)가 찾아오지 않았을 때에는 토(土)는 토(土)로써 머물 뿐 그 존재의 이유와 가치가 없겠지만 수기(水氣)와 목기(木氣)가 찾아왔을 때에는 토기(土氣)가 수기(水氣)와 목기(木氣)의 바탕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처럼 만물(萬物)은 상호 간에 돕고 해(害)하는 과정에서 그 근거가 될 때에 비로소 다른 세계로의 나아감을 기약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큰 학자가 될 만한 소년에게 학자적인 영특함을 토기(土氣)에다가 비유하고 소년에게 큰 학자의 길을 일러주는 서책이나 스승과 같은 인연을 수기(水氣)에다가 비유하며 소년이 장차 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을 때에 목기(木氣)에다가 비유를 한다. 이때에 소년은 토(土)가 되고 그의 인연은 수(水)가 되며 여기에서 터득하는 학문이나 기술 과학은 목(木)이 된다.

이것을 역(逆)으로 살펴보면, 지면(地面) 위에서 물은 흐를만한 곳으로 흐르게 되고 나무는 물이 존재하는 곳에서 생육을 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물이 흐를 만한 여건이 되었을 때에 수기(水氣)가 따르게 되고 목기(木氣)의 결실을 보는 것이다.

만약 복(福)된 삶을 원하는 사람이 도박이나 주색만을 탐하면서 산다는 것은 사막 위에서 물을 갈구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래서야 어찌하여 복된 삶과 성실한 삶을 누릴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토기(土氣)는 머무는 자리와도 같고 수기(水氣)는 나아갈 때의 지혜와도 같으며 목기(木氣)는 머물러서 거두는 행실(行實)이라고 한다. 그리고 머무는 곳이 마땅하고 나아감이 반듯하며 행함에서 거짓이 없다면 복(福)은 그 가운데에서 생겨나는 손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리(一理)는 만리(萬理)에 통(通)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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