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청주 청남초등학교

미국 발 금융 위기 여파로 인해 imf체제 보다 더 심각한 경제 위기를 맞고 있다. 1960년대 경제 부흥기를 거쳐 1990년대 중반까지 탄탄대로를 달려오던 대한민국이 1996년 imf 금융 위기로 한 때 국가적인 경제난을 겪었으나 전 국민들이 슬기롭게 극복,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0년에 만에 다시 찾아온 현재의 경제 상황도 국민들이 민족의 저력을 발휘, 신속하게 극복해 나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조상들의 특별한 교육열이 주춧돌이 됐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피 지배국가로 전락해 온갖 수모를 당하던 일제강점기 때도 '미래의 희망은 오직 인재양성 밖에 없다'는 선조들의 굳은 믿음이 우리나라가 선진국 반열로 진입하게 만드는 초석이 됐다. 새정부들어 교육계에도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가운데 교육의 고장 충청권에서 근대교육의 '효시(嚆矢)'가 된 개교 100주년이 넘은 20개 학교를 조명하면서 밝은 미래를 기대해 본다.
▲ 초창기 청남학교 양철지붕 제1교사 (1904∼1923년)

◀ 근대학교의 출발·민족교육의 중추적 역할
▲ 청남학교 설립자 김태희 선생(초대교장)
한국 근대교육은 기독교에 의해 전래되고 발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북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에 예배당이 마련되면 학교를 병설해 운영했는 데 그 대표적인 예가 청남학교다. 청주 청남초등학교(교장 김종수)는 개화 사상에 자극돼 새로운 학문을 지향하는 민족적 기운이 팽배하던 시기에 교육 구국의 이념을 갖고 있던 방흥근·김태희·김원배 선생에 의해 1904년 11월1일 광남학교(廣南學校)로 설립됐다.
당시 우국 지사들이 뜻을 모아 청주군 남주내면(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1가) 방 선생의 사택에서 학생 15명으로 개교한 2개 교실의 사립 광남학교는 충북 근대 학교의 효시로 청주지역 민족 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초대 교장은 김태희 선생이 맡았다. 1908년 8월1일 광남학교에서 청남학교(淸南學校) 로 교명이 변경됐고 같은 해 11월1일 대한제국 학부대신 설립 허가를 받아 미국인 선교사 민노아(閔老雅)가 경영하게 됐다.
청남초 교명은 고려 초 축조된 청주읍성의 청남문(淸南問)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성곽 도시였던 청주읍성의 관문 역할을 한 청남문의 명칭을 따 청주 최초의 학교를 청남학교로 표기해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청남초는 1921년 4월1일 4년제에서 6년제 학교로 승격했다. 따라서 1922년과 1923년도 졸업생이 없다. 1922년 10월5일 제일교회 뒤 '망선루'에 학교 건물이 신축 준공됐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청주에서 과거 시험을 치르고 합격자의 방을 망선루에 붙였다고 하는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건축물로 청남초의 유구한 역사를 뒷받침한다. 1923년 4월1일에는 청신여학교를 흡수해 남·여 공학 학교로 새출발하게 됐다. 1924년 9월에는 기독교계 사립학교로 교사와 학생들의 민족 정신이 투철, 애국심을 고취시켜 선망의 대상이 됐으나 당시 일제로부터 혹독한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 신사참배 거부·휴교 처분
청남학교의 강한 민족의식 표현은 신사참배를 거부는 데서 표출됐다. 신사 문제는 단순히 종교적 신앙과 관련된 문제 만이 아니라 민족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정칟사회·문화·교육·사상의 문제였다. 일제는 1922년 '동공원(현 청주시 상당구 문화동)'에 청주신사가 설치되면서 관공서는 물론 공립학교 교사와 학생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요구했다.
1930년대 들어서는 신사참배가 국민의례이며 학생들에게 천황의 식민이 되게 하는 데 있다고 강변하면서 사립학교와 기독교 학교인 청남학교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러나 청남학교는 단호히 거절하면서 신앙과 민족의식을 고수해 나갔다. 경례 구령이 떨어지면 45도 각도로 몸을 숙였지만 청남학교 학생들은 머리를 숙이지 않고 꼿꼿이 서 있거나 구령에 맞춰 뒤로 돌아섰다는 것은 널이 알려진 이야기다.
이는 우상 숭배 거절이라는 기독교 정신에 따른 행동이기도 했지만 조선 민족으로서 일본 천황에게 절을 할 수 없다는 민족적 긍지와 독립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청남학교는 1935년 4월15일 청남학교 개교 30주년 기념식을 갖기도 했으나 1936년 10월12일 신사참배 불응으로 9일간 휴교 처분을 받는 고통이 뒤따랐다.
8일 후인 10월20일 다시 개교했으나 종전의 학교 교사와 선교사들이 학교를 떠나 주인 없는 학교가 됐다.
▲ 청남 35회 동창들의 속리산 소풍 (1945년)


◀ 1942년 현 위치에 '배움 터' 마련
같은 해 12월4일에야 교육 경험이 있는 최동선이 학교를 인수했다. 1938년 4월1일 교회를 떠나 제일교회 앞 양말공장과 남석교 부근의 창고 등지로 전전하면서 학업을 이어갔다 1942년 7월1일 도지가 김용태 선생이 토지 70두락(2만평)을 기증하면서 교장으로 취임한 뒤 청주시 상당구 영운동 127번지 현 위치로 학교를 이전해 배움의 터전을 마련하게 됐다.
당시 일제는 강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몇 개의 사립학교를 합병해 공립학교로 만드는 시책을 취했다. 이로 인해 1945년 4월1일에는 대성학교와 청남학교가 합병돼 '성남초등학교'로 개명했고 교장도 일본인이 임명됐다. 그러나 광복 후인 같은 해 9월24일 '청남'이라는 옛 이름을 다시 되찾아 청남국민학교로 교명을 환원해 현재에 이르게 됐다. 6개월여 만의 일이다. 청남학교는 이후 1962년 8월30일 옛 본관 2층 건물이 3회 걸쳐 완공됐고, 1985년 11월20일에는 신 후관 3층 교사가 4회에 걸쳐 완공됐다.
1990년 9월27일에는 신 본관 태양열 교실 3층 건물이 3회 걸쳐 건립됐다. 1996년 3월14일 청남국민학교에서 청남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됐으며 1999년 10월9일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제일교회 뒤 망선루 옛 학교 건물이 해체됐으며 2000년 12월7일 망선루가 중앙공원 내로 이전되면서 옛 교사가 복원됐다.
청남초가 2004년 11월1일 개교 100주년 기념 행사를 가지면서 충북도내 근대학교의 효시인 사실이 널리 알져지게 됐다. 2008년 2월20일 98회 졸업식을 가지면서 현재 졸업생 수가 모두 1만7443명에 달하게 됐다.

◀'자랑스러운 청남인상'


청남초는 개교 100주년 행사 때 '자랑스런 청남인상'을 제정했다.
△사회 봉사부문에는 2대 총동문회장과 충북도의원, 충북야구협회장을 역임한 윤태한 동문(49회)이 선정됐다. 청신운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윤 동문은 사회봉사, 장학사업, 총동문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됐다. △최고경영자 부문의 윤문식 동문(50회)은 국내 최대 규모의 유리 가공·제조 회사인 제일 gmb(주)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국가 경제발전과 고용안정 촉진에 기여했다. △치안행정 부문의 이금형 동문(61회)은 우리나라 경찰 역사상 3번째로 총경으로 승진했고 진천경찰서장을 역임했다. 성폭력 범죄 예방과 과학수사 발전에 기여했다. △문학 부문 반칠환 동문(67회)은 동아일보 신촌문예에 당선됐고 서라벌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던지는 사랑>, 시선집 <누나야> 등이 있다.△체육 부문은 윤병순(66회)·이운재(76회) 동문이 뽑혔다. △교육 부문 채희동 동문(81회)은 2004 대입수학능력시험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했다. /김헌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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