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 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왜가리가 둥지를 틀었던 수령 800여년 노거수 은행나무를 찾았다.

'진천의 왜가리 번식지, 천연기념물 제 13호' 란 안내판이 덩그마니 서 있을 뿐 최근엔 그들이 머문 흔적은 없다.
 
깃드는 이 없어 둥지조차 허물린 나무에 가을이 노랗게 매달려 있다. 제

풀에 쏟아져 내린 은행알들이 맷방석처럼 쫙 깔려 그만의 향취를 풍긴다.

고약한 냄새지만 살아 있다는 증거이니 반가운 마음이다.

언제부터인가 봄이면 인근의 푸른 숲이 온통 하얀 백로 떼로 장관을 이루던 곳이다.

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을 받아 보호되어 왔다. 한동안 우리 지역의 명물로 각광을 받기도 했던 것이 왜가리 분뇨의 독성으로 피해가 속출하며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우리 속담에 '할아버지가 손자를 귀여워하면 수염이 남아나지 않는다.'고 했다.

수백의 왜가리 백로들이 저를 품어 주었던 800년 노 할아버지의 상투 끝에서 난장질을 쳐댔다.

그 바람에 나무는 윗부분부터 서서히 말라 죽어가기 시작했고 형편없는 몰골로 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신세가 됐다.

그 후 백로 떼들은 미련 없이 또 다른 솔숲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싱싱하고 생기로운 나무숲을 찾아 떠난 것이다.

빈 둥지가 되어, 뒷전으로 밀려난 늙은 어버이의 형상으로 홀로 서 있는 은행나무에서 무상함의 바람이 인다. 

건너편 등성이에 새로 터를 잡아나간 저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왁자글 대며 새 터에 둥지를 틀고 희희낙락이다. 참으로 밉살스런 모습이다. 

어쩌면 저들도 제 유리한 쪽으로 줄을 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희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심사를 그대로 닮아 가는 것 같아 씁쓸하다.

저네들은 왜 은행나무 둥지를 떠나갔을까. 자기들이 짓밟아 살 수 없이 해 놓고 환경이 오염됐다느니, 정주여건이 적절하지 않다느니 하는 이유를 들어 이곳을 버리고 훨훨 날아간 것인가.

그래도 노 할아버지나무는 말이 없다.

배신감이나 원망으로 자신을 자책하지도, 삶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나무는 수많은 생장점을 갖고 있어 쉼 없이 새살을 만들어 상처를 치유하며 제 스스로 삶은 이어간다.

도저히 회생될 것 같지 않은 은행나무는 두 갈래 가지 중 하나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새들의 풍세에 시달리지 않고 휴지기를 거치는 동안 밑둥치에서도 여기저기 새 움을 틔워 곁가지가 나고 있다.

한 손아귀에 드는 줄기도 여럿 있고, 두 손아귀에도 잡히지 않을 만큼 제법 굵직하게 몸체를 키워가는 녀석도 있다.

밑둥치를 빙빙 돌며 꿈틀대는 새 생명의 소리에서 강한 생명력을 느낀다.

이제 몸 안에 스며들었던 분뇨의 그 독성이 어느 정도 빠졌는가보다.

자손을 다닥다닥 달고 제 2의 삶에 살아가고 있는 은행나무의 모습이 경이롭다.

이제 더 이상 그가 떠난 빈터에서 쓸쓸히 고사될 걱정은 안 해도 될 듯하다.

완전히 생기를 되찾아 저리 수많은 자손을 금싸라기처럼 쏟아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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