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고요한 마음을 가다듬고 숨을 고르고 온 몸의 기운을 위와 아래 그리고 좌우로 고르다 보면 차츰 멀어져 가는 외부의 소리가 있고 내 안에서 찾아오는 내 안의 소리가 있다.

이렇게 내부(內部)와 외부(外部)의 기운들이 교류하는 얼마동안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천기(天氣)가 아래로 내려오고 지기(地氣)가 하늘로 올라가는 시간까지 이른다.

그리고 다시 천기와 지기가 고요하면서 짧은 순간의 적막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이때에 나타나는 신기(神氣)의 작용은 아롱거리고 맑아진 영(靈)의 기운은 하늘로 치솟으며 몸 안의 기운은 편안함을 유지해 한가롭기가 그지없다.

그리고 나타났던 상념들이 사라지고 혼란스럽던 마음들도 사라지며 어지럽던 기운들이 하나씩 사라져 갈 때쯤에서 천지간의 기운과 호연일체가 되는 순간을 다시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마음과 생각은 혼란스럽지가 않아서 육신의 기운은 수고롭지 아니하고 영기(靈氣)와 신기(神氣)가 다음의 일들을 의논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과 생각과 육신이 다함께 고요함 속에서 머물 때에 보석처럼 빛나는 진실(眞實)이 찾아들고 맑은 물처럼 순수한 겸(謙)과 공(恭)이 찾아오며 달빛처럼 고요한 정(靜)한 기운이 찾아올 때에 함께 동하는 이치를 일러서 운성(運性)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운성(運性)은 마음과 생각과 무념이 다함께 맑고 고요한 가운데에서 육신에 머무는 육기(肉氣)를 창고로 하여 저장을 할 수가 있다.

이때에 온 몸을 통하는 것을 기운(氣運)이라 하고 이 기운이 사람과 천지간에서 통로 역할도 하면서 동시에 창고의 역할(役割)도 하는 곳을 일러서 단(丹)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단(丹)에 머물러 있는 기운 중에서도 운성과 교류가 가능한 기운을 단성(丹性)이라고 한다.

한편 몸을 보호하고자 하는 기운은 육기(肉氣)의 발상지가 되는 곳으로 다시 모이고 심(心)을 보호하고자 하는 기운은 심기(心氣)의 발상지가 되는 곳으로 다시 모이며 령(靈)을 보호하고자 하는 기운은 영기(靈氣)의 발상지가 되는 곳으로 다시 모이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몸에는 육신을 지탱하는 기운이 있고 마음을 지탱하는 기운이 있으며 정신을 지탱하는 기운이 있어서 각각의 동(動)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동(動)을 하고자 할 때에는 고요한 마음과 맑은 무념 그리고 올바른 정신  세계가 원활하게 활동을 하면서 상호간의 교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修行)하는 사람의 의식 속에서는 육체도 없고 마음도 없고 정신도 없는 하나의 기운(氣運)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을 하는 수행자(修行者)의 말씨는 저절로 공손하고 행동은 저절로 겸손하여 마음은 저절로 진실하여 지는 것이다.

물론 공손한 말씨와 겸손한 행동 그리고 진실된 마음이 또한 무념과 마음을 이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후(先後)를 구분하기보다도 궁극적으로 운성(運性)의 이치를 따르려는 자세가 모범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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