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찬순 시인·희곡작가] 일제 강점기, 그 죽음의 터널을 지나며 민족의식이 높았던 지식인들이 선택할 길은, 타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며 임정을 이끈 백범 김구와 직접 총칼 들고 싸우던 홍범도와 이범석 등이 걸었던 가시밭길과 총은 들지 않았지만 가장 치열하게 일제에 항거하다 감옥을 수도 없이 드나든 심산 김창숙, 도산 안창호 등 그리고 인생 전체를 걸고 문화재를 지킨 간송이 선택한 길이 있다. 그 반대로 조국과 민족을 무참하게 배반하고 짓밟은 친일파들이 거닐던 길도 있었다.
 
간송은 그의 일생에서 두 가지 민족적 사업에 몸을 던졌다.
 
하나는 조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 사업이었다. 1940년 동성학원을 설립했고 같은 해 보성고보를 인수하여 그 자신이 교장이 되어 최 일선에서 교육을 이끌었다.
 
다른 하나는 역시 문화재를 통한 높은 애국심의 표현이었다. 1934년 성북동의 북단장을 인수하여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적 재산을 확보했고 1938년 그곳에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세웠다. (광복 후 한국민속미술연구원으로 다시 간송미술관으로 개칭했다) 그곳에는 모두 11점의 국보를 비롯하여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다.
 
1935년이었다. 영국인으로 일본 동경에서 오랫동안 인기 변호사가 된 존 개즈비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한국의 청자와백자에 마음을 빼앗겨 모은 것들을 모두 처분한다는 정보를 입수 했다. 국보급 20여점이었다. 일본의 돈 많은 수집가들이 잔뜩 눈독을 들이고 몰려들었다. 간송은 공주의 2백석지기 농장을 판돈을 가지고 달려갔다. 일본인들과 함께 값을 흥정했다. 그 가운데 하나를 내보이며 개즈비는 대뜸 입을 떼었다.
 
"이만원."
그 소리에 일본인들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헉, 보통 도자기 하나에 이천원인데  이만원이라니, 원 세상에."
워낙 최고품들이니 값이 높은 줄은 알았지만 정작 일본인들은 입을 딱 벌린 채 다물 줄은 몰랐다. 그때 간송은 그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하나하나 모조리 뜨거운 애정으로 취한 듯 바라보며 가슴에 안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개즈비는 오히려 그가 얼마나 자기 조국의 문화재를 사랑하는가를 확인하고 감동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전체 50만원을 불렀는데 스스로 40만원만 받겠다고 한 발 물러났다. 간송은 2백석지기 농장 토지 값을 서슴없이 내주었다.
 
6·25가 터지자 간송미술관은 비상이 걸렸다. 최대한의 문화재를 이끌고 부산으로 피난 갔다. 북한군은 9.28 무렵에 들이닥쳤다. 그 많고 귀중한 문화재를 빼앗아 갈 심산으로 총을 들이대고 짐을 싸고 포장할 때 소전 손재형과 최순우가 일부러 계단에 굴러 떨어져 다치면서까지 시간을 끌었다. 그 때문에 북한군은 시간에 쫓겨 빈손으로 도망쳤다.
 
한편, 9·28이 닥치자 부산에 끌고 갔던 것을 다급하게 서울로 옮겼다. 다음날 그곳에 불이 났다. 그렇게 간송미술관은 눈물겹게 우리 국보급 문화재를 결사적으로 확보하고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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