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숙 열화당책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며칠 사이에 겨울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그래도 베란다 앞 감나무에 주홍빛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보니 아직은 만추의 기운이 남은 것 같다.
 
가을에 열매를 맺기 위해 해마다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잎이 무성해진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인 봄이 되면 어김없이 아름다운 꽃구경 가는 상춘객으로 길마다 북적인다.
 
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숲이 울창한 계곡을 찾아 발을 담근다. 가을이면 형형색색으로 물든 단풍을 즐기려는 인파로 만산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리고 풍성하게 매달린 열매를 수확한다. 늦가을에 낙엽조차 뿌리로 돌아가고 나면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벌거벗은 가지는 다시 봄에 싹을 틔우기 위해서 혹한을 견디어 낸다.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다.
 
얼마 전 한국화가 이호신 화백의 '꽃진 곳에 열매'전이 열렸다. 산수벽에 취해 자연을 찾아 헤맨 끝에 그가 안착한 곳이 경남 산청 남사 예담촌이다.
 
거기에 둥지를 틀고 자연을 벗 삼아 작품 활동에 전념하는 작가는 한여름과 늦가을의 모습을 다양한 구성으로 화폭에 담아 자연의 섭리를 노래했다. 
 
짝짓기에 여념이 없는 풀벌레의 모습에서 종족보존의 본능을 들여다본다. 창녕 우포늪의 여름철새들과 희귀식물들의 여유롭고 한가한 모습은 생태 보존의 중요성을 암시한다. 이웃이 건네준 알알이 익은 빨간 석류도 화폭에 담는 순간 시가 된다.
 
담장 안쪽 자신의 집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몇 개의 감에서는 마음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두 발로 서서 열매를 따 먹으려 안간힘을 쓰는 반달가슴곰은 생존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작가 부부가 수확한 먹음직스런 고구마에는 풍요로움이 충만하다.
 
나뒹구는 낙엽과 떨어진 밤송이는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이치를 보여준다. 그림 한 점 한 점에 자연의 오묘한 섭리, 인간과 자연의 조화, 공생 그리고 상생의 의미가 있어 작가의 철학이 가득 담겨져 있는 듯하다. 이 화백의 작품 속에는 나이듦조차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하면서 숙연한 마음이 들게 한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봄인 청춘은 파랗기에 아름답고, 여름인 장년은 무성하여 좋고 열매가 매달린 중년은 거두어들일 것이 있어 풍성하고, 잎조차 떨어진 노년에는 내려놓고 자연으로 돌아갈 일이 남았기에 더없이 안락하다. 이는 땅에 태어난 어떠한 생물도 거부할 수 없는 대자연의 섭리다. 평생을 일신으로 투쟁한 김영삼 전 대통령도 영욕의 세월 뒤에 '조국의 민주화'라는 열매를 남기고 눈발 내리는 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올해도 어김없이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각자 봄에 씨 뿌린 곳에서 열매를 거둘 시간이다. 혹 그 열매가 빈약하다면 지나간 시간을 탓하지 말고 다시 오는 봄에 어떤 씨를 뿌려야 할 것인가를 지금 생각하면 된다.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현재가 가장 소중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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