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찬순 시인·희곡작가] 툭하면 우리가 찾아가는 청천 화양동은, 화양구곡의 수려한 자연뿐 아니라 숱한 역사도 가슴에 잔뜩 담고 산다. 그 가운데서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빼놓을 수 없는 두 산봉우리에 속한다. 그 두 산봉우리를 아주 화려하게 거느린 주인공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이다.
우암은 조선왕조에서 참으로 드높은 깃발을 수도 없이 세운 기록을 남겼다.

첫째, 그는 이율곡 김장생에서 이어 받은 기호학파의 서인으로서, 노론의 영수로 조선왕조에 최대한 영향을 던졌다. 그는 먼저 뛰어난 학자로 세상에 이름을 높였다. 어느날 제자가 스승님은 맹자를 천번이나 읽었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내 어느 젊은 날, 문을 걸어 잠그고 맹자를 내리 오백번을 읽은 적이 있는데 모두 천번만 읽었겠는가. 이천번도 더 읽었을 것이다."
조선왕조 전체 중에서 이런 예가 또 있을까 또 어찌 맹자만 읽었겠는가.

둘째, 우암은 인조11년(1633)부터 숙종15년(1689) 죽음을 맞을 때까지 네 임금(인종, 효종, 현종, 숙종)으로부터 출사를 요구 받은 것이 무려 167회였다 한다. 그러나 그에 응한 것은 단 37회에 불과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이조판서, 우의정 두 차례 그리고 마침내 좌의정에 올랐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조정에 직접 나가 근무한 날짜는 가까스로 49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 또한 추종을 불허 할 것이었다. 문장력도 뛰어나 이충무공등 역사적인 유명인사의 묘비를 600편이나 썻다.

셋째, 우암은 일생을 검소하게 살아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비단옷을 입은 적이 없고 옥관자를 단 적이 없다.
1698년 6월8일, 제주도로 귀양 간 우암을 한양으로 불러올리는 과정 중 정읍에서 금부도가 사약을 전했다. 당대 최고의 정치가이고 거유(巨儒)이며 노론의 영수가 최후를 맞는 광경은 너무나 초라했다. 그 앞에는 너절한 거적이 까려 있었다. 제자들이 좀 괜찮은 자리로 바꿔달라고 청했다. 대뜸 우암이 반대하고 나섰다. "내 선친은 돌아가실 때 이만한 자리도 없었다"고 꾸짖었다.
그 사후 우암은 조선조에서 제일 많이 서원에 제향 되었다. 화양서원을 비롯해 혼자 배향된 독향 만도 13개소나 되고 전체 46개소에 이른다(퇴계 31개소, 율곡 21개소에 비하면 엄청난 수다) 그것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넷째, 조선조가 최초로 가장 존경하는 스승에게 붙이는 접미사 '자(子)'를 국가가 공식화한 것은 오직 우암 송시열뿐이었다. 송자(宋子)다.

다섯째, 1392년 이성계가 군사 구테타로 고려를 뒤엎고 나라를 세우고 1910년 맥없이 그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조선조를 완벽하게 담은 크나큰 그릇, 아름다운 꽃, 거대한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에 등재한 세계기록문화의 최고봉이다.

그곳에 가장 많이 이름이 오른 사람은 누구이고 몇 번쯤 될까.
그가 우암 송시열이고, 이름이 오른 횟수가 무려 3000번이라 한다. 참으로 충격이었다. 많은 비난도 받았지만 그렇게 우암의 삶 자체가 충격의 연속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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