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로켓으로서 그 이름을 떨친 전기공학자(電氣工學者) 슈미트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소련군의 포로가 돼 탄광에서 고대국가의 노예와도 같은 가옥한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식량사정은 극도에 이르러 동료들은 뼈와 가죽만 남은 채 하나 둘 씩쓰러져 갔다. 그 지옥과도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미국으로 탈출하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한다.

그전부터 알고 지내던 미국소녀와 로스앤젤레스의 거리를 걷고 그곳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하는 광경을 마음 속에 그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강제 수용소에서 아침 점호를 하던 중간수장이 돌발적인 사고로 인해 잠깐 자리를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수용자 중 한 사람을 잘못 헤아렸다.

이를 계기로 슈미트는 탈주(脫走)를 꾀하게 된다. 저녁 때 점호해 봐도 아침에 수와 똑같았으므로 다행히 그의 탈주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폴란드, 스위스를 거쳐 드디어 꿈에 그리던 로스앤젤레스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마음속에 그려왔던 이미지대로 로스앤젤레스의 거리를 그 소녀와 손을 잡으면서 걷고 레스토랑에 마주앉아 식사를 하고 드디어 결혼에 성공했다.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으로만 보이는 슈미트의 탈주는 결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그의 잠재의식이 선명한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거대한 지혜와 힘을 발휘해 서로 연관되는 기적을 일으킴으로써 목적을 달성시켜 줬다고 봐야한다.
 
이태리가 낳은 세계적인 테너가수 카루소는 밤마다 "커다란 극장에서 초만원을 이룬 청중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는 모습"을 그려왔으며 헨리 포드는 "미국 안에 자기가 만든 자동차로 가득 차는 그림을 마음 속으로 그려왔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러한 성공자들은 그만큼 자신의 잠재의식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믿고 있다. 사고(思考)의 씨앗을 잠재의 땅에 심고 있는 것이다. 잡초의 씨앗은 잡초가 되고 야채의 씨앗은 야채가 된다. 따라서 만약 장미꽃을 피우게 하려면 장미의 씨앗을 잠재의식에 뿌려야 하며 성공이나 부(富)를 바란다면 그 씨앗을(자기암시) 심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힘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숨은 보고(?庫)의 문으로 통하는 열쇠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여기에는 그만큼의 노력과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바라는 희망을 시각적인 이미지로서 마음의 깊은 자리에 심는 것이다. 잠재의식에는 의식하는 마음으로부터 보내진 것을 취사선택하거나 판단하는 능력이 없다. 바로 그 점에 자기가 바라는 바를 실현하는 그림을 끊임없이 그려주고 이를 다짐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 버려도 희망만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바라는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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