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찬순 시인·희곡작가] 고려 때였다. 지방관아에 아주 특이한 송사가 일어나서 사람들이 온통 들끓었다. 높은 벼슬과 명성을 떨친 학자이면서 재산가였던 윤선의 삼년상을 치루고 며느리가 들어와서 금방 시누이를 고변한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며느리는 시아버지 생전에 적극 나서 혼약을 정해놓은 터여서 한층 더 화제가 됐다. 그 때문에 재판이 있던 날은 사람들이 구름떼 같이 모여들었다. 동헌에는 지방 수령 이방, 형방, 포졸들과 윤선의 장녀,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윤씨 문중 사람들이 긴장 한 채 서 있었다. 재판관인 지방관 수령이 하나하나 문초를 했다.
 
맨 처음 아들에게 다그쳤다. "네 이름으로 이 고변장을 써놓고 어째서 며느리 고변이라 말하는 것이냐." "실은 제가 쓴 것이 아니고 제 처가 쓴 때문입니다, 네." 재판관은 고변장의 글씨와 내용이 아주 훌륭해서 놀랐고 다른 사람들은 새색씨가 글을 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어째서 갓 시집 온 새며느리가 손위 시누이를 고변해 조용한 이 고을에서 전 고려를 떠들썩하게 만드는가?"하고 언성을 높였다.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저희 시누이께서 유산을 몽땅 차지하고도 모자라 저희들을 빈손으로 내쫓으려 한 때문입니다. 문중 어른들께서 아무리 꾸짖고 만류하고 달래도 도무지 막무가내였습니다." 문중 어른들에게 추궁했다. "윤선 어른의 집안에서 어떻게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도록 방치했습니까? 문중 어른들의 책임인 것은 아십니까." "어휴, 말두 마십시오. 제 조카 딸년이 얼마나 억세고 억지가 대단하고 욕심이 하늘을 찌르고 안하무인인지 천하장사가 와도 못 당합니다." 

사뭇 비웃음을 머금고 있는 딸에게 소리쳤다. "어째서 친정아버지의 유산을 다 차지하고 남동생은 한 푼 안주고 내쫓으려 했는가." "저는 제 아버지의 유언을 지켰을 뿐입니다. 여기 유서도 남겼습니다." 품에서 유서를 꺼낸다. 포졸이 재빨리 받아서 전한다. 그것을 펼쳐본 재판관은 꿈틀하고 며느리에게 되쏜다. "지금 따님의 말 들었는가. 그런데도 두 번째 이유가 있다는 건가?" "저것은 시아버지 병환 중일 때 밤낮없이 닦달해서 억지로 쓰게 한 것이고, 생전에 건강하시고 정신이 맑을 적에 써놓으신 진정한 유서가 이것입니다. (편지를 펼쳐 읽는다.) 며늘아기야 내 딸의 성정이 사납고 아들은 어리석으니 네가 이것을 잘 활용하라 말씀하시고, 벼루 먹 종이 그리고 붓을 남기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하고 다그치자 오히려 재판관은 쩔쩔매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저는 압니다. 그 벼루에 물을 붓고 그 먹을 갈아 그 종이에 그 붓으로 저희 집안일을 고변하면 공정하게 해결해 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라가 고려법에 따라 재산을 중분(中分)해 줄 것이 아닙니까.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모두 감동했다. 특히 재판관은 더욱 감탄하며 명쾌하게 말했다. "모든 재산을 중분하고 집과 서책은 모두 아들과 며느리에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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