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찬순 시인·희곡작가] 한 농부가 밭에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며칠 전에 심어 놓은 콩을 산꿩이 쪼아 먹느라고 밭을 마구 파헤쳐 놓았기 때문이다. 농부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서 소리쳤다. "네 이놈, 나한테 잡히면 네놈 모가지를 홱 비틀어서 펄펄 끓는 물에 푹 삶아 먹고 말테다 두고 봐라" 농부는 다음 날, 다시금 씨앗콩을 가져다가 밭에 심고 힘주어 꼭꼭 밟았다. 그리고는 은밀하게 덫을 설치해 두고 입가에 함박웃음을 담았다.

또 며칠 후 농부는 다시 밭으로 나갔다. 그런데 밭에 이르자 산꿩이 덫에 걸려 슬피 울고 있었다. 농부는 "핫, 핫, 핫" 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흥, 네놈이 기어코 내 덫에 걸려들었구나"  농부는 가까이 다가가 덫에서 산꿩을 떼어내고, 정말로 모가지를 홱 비틀어 숨통을 아주 끊어 놓았다. 농부는 의기양양하게 꿩 모가지를 오른손에 쥐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이 이 꿩을 보자 몹시 안쓰러워하자  "이놈이 우리 밭에 심은 콩을 사정없이 파헤쳐 우리 가족의 생계를 위협한 놈이라구, 내 뽄대를 보여 준다고 벼르던 참에 오늘 이놈이 걸려 든 거야 핫, 핫, 핫 "하고 농부는 어깨를 으쓱대며 말했다. 그런데도 아내는 혀를 끌끌 차며 계속 마뜩잖아 했다. 그

날 저녁 농부는 손수 솥에 물을 붓고 장작을 지펴 펄펄 끓였다. 그리고 꿩을 통째로 집어넣고 한참 후 털을 모조리 뽑았다. 아내는 할 수 없이 꿩요리를 만들어 저녁상에 올렸다. 농부는 맛있게 먹었다. 아내는 수저를 드는 둥 마는 둥 했다. 뼈는 작은 것 하나도 빠짐없이 그릇에 담아 부뚜막 위에 놓아뒀다. 그날 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졌다. 농부는 문득 잠이 깻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애절한 산꿩 소리가 들려왔다.

농부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 울음이 처절했기 때문이었다. 왠지 가슴이 쿵쿵 뛰기까지 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재빨리 부엌으로 나가 불을 밝히고 뼈를 담은 그릇을 확인했다. 뼈는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은 채 텅 비어있었다. 도무지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하고 방으로 돌아와 아내와 아이들을 흔들어 깨우고 뼈를 다른 곳에 버렸느냐고 추궁했다. 가족들은 모두 손도 안 댔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특히 아내는 가장 못마땅해 했다.

동이 트자마자 농부는 콩밭 쪽으로 초조하게 내달렸다. 밭 근처에 이르자 밭과 연결된 산자락에서 한껏 처절한 산 꿩 울음이 들렸다. 농부는 허둥대며 산자락, 소리가 나는 갈잎을 헤쳤다. 그곳에서 꿩의 둥지가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 둥지에는 모가지가 홱 비틀어진 꿩의 뼈들이 작은 조각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원상태로 맞춰진 채 어린 새끼들을 품안에 잔뜩 끌어안고 애간장이 녹아 흐르는 듯한 처연한 통곡을 터트리고 있었다.

농부는 산꿩의 처절한 통곡과 앙상한 뼈들로 맞춰진 어미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산꿩과 함께 꺼이꺼이 울며 자신의 가슴을 꽝 꽝 쳤다. 죽음을 초월한 초자연적 모성애를 두고 삼국유사의 일연은 농부가 훗날 크게 자책하고 그곳에 절을 짓고 산꿩의 명복을 빌었다고 적었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