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영 서원대 교수

▲ 황혜영 서원대 교수

[황혜영 서원대 교수] 연초에 저녁을 먹으며 남편과 앞으로의 생활과 거처에 대해 이런 저런 구상을 잔뜩 그려보다가 확실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앞을 내다볼 수 없어 답답해하다 이전에도 그래왔듯 '그때 가서 생각하자'로 마무리하고 산책을 나섰다.
 
걸으면서 남편은 막 읽기를 끝낸 박완서 단편집 마지막 작품이 인상적이었다며 들려줬다. 작가가 말년에 쓴 '대범한 밥상'(2006)이라는 작품인데 필자의 마음에도 와 닿아 읽어 봤다.
 
화자는 3개월 반 시한부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3년 만에 자신도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남편이 마지막 3개월 반을 꼬박 바쳐 모든 재산을 정리해 형편이 어려운 막내딸에게 더 물려줘 삼남매 재산이 '공평'해지게 해줬건만 막상 현실은 살아생전 남편의 기대를 빗나가 막내사위 사업실패로 막내 형편은 원래대로 돌아가고 땅값이 고르게 오르지 않자 남매간에 시기와 다툼이 생겨 좋던 우애에 금만 가게 된다.
 
화자는 자기도 여생을 공정한 재산분배에 바쳐야 하나 고민하다 문득 여고 동창 경실이가 생각나 찾아가게 된다.
 
경실이는 외동딸 내외를 비행기사고로 잃고 어린 외손자, 외손녀와 홀아비 바깥사돈을 자기 집에 데리고 와서 살다가 급기야 바깥사돈이 사는 지방에 가서 살림을 합친 일로 친구들 입방아에 오르곤 했다. 바깥사돈이 손녀 앞에서 경실이를 '하니'라고 부르더라는 말은 더 충격을 줬다. 스캔들 내막이 궁금하기도 하고 이제 손자들은 미국 유학을 보내고 바깥사돈도 죽었으니 경실이야말로 거액의 사고 보상금과 유산을 어떻게 처리할지 잘 알 것 같아서 화자가 조언이라도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궁금해 하는 화자에게 경실은 의외로 담담히 돌솥밥에 자연밥상을 차려주며 부모를 갑자기 잃은 남매가 서로 손을 잡고 또 외할머니와 할아버지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아 모두 자기 집에 갔다가 바깥사돈이 다시 지방의 직장으로 복직할 때가 되자 아이들도 같이 간다고 하기에 할머니는 갈 수 없다고 해도 아이들이 받아들이지 않아 모두 지방에 내려왔다고 답해준다.
 
세상 상식에는 부자연스러워도 "그 애들이 절박하게 원하는 거면 다 옳은 일"이었던 경실은 바깥사돈과의 스캔들을 상상하는 사람들의 오해나 비난을 대담한 초연함으로 무시하고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졌다. '하니'도 사실 어린 손녀가 할머니를 부르던 발음이었는데 커서도 계속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
 
인색하지도 헤프지도 않게 가진 것에 풍족해하여 나누고 소유에 연연해하지 않는 경실은 스캔들로 향하는 화자의 호기심을 "저 앞산을 좀 봐라"며 자연으로 돌려준다. 경실이 내주는 자연과 자유로 빚어낸 '대담한 밥상'을 뚝딱 해치우며 화자는 아마도 남을 생의 짐을 훌훌 털어버렸을 것이다. 노작가의 유머에 녹아낸 삶을 응시하는 깊은 시선이 내일에 대한 필자의 막연함과 두려움을 한바탕 웃음으로 털어내게 해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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