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나가 충청대 교수] 대구시내에서 냉천의 흐름을 거꾸로 거슬러 가다보면 소싸움으로 유명한 청도로 넘어가는 팔조령 고개 밑에 우록동(友鹿洞)이라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다.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언뜻 보기엔 여느 산골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농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곳은 임진왜란의 숨겨진 영웅 사야가(沙也可) 즉 김충선 장군(1571~1642)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사성(賜姓) 김해김씨의 집성촌이다.

사야가가 남긴 글을 모은 '모하당문집(暮夏堂文集)'에 의하면 그는 지난 1592년 왜란이 일어나자 22세의 나이에 일본군의 제2군단 가토 기요마사(加藤 淸正)의 선봉장으로 부산해 상륙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조선의 유교문화를 사모하던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대의 없는 전쟁에 가담할 수 없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힌 다음 수하의 군졸 3000명을 데리고 조선군에 투항했다. 젊은 왜장 사야가는 결코 전쟁이 두려워서 일본군을 이탈하고 조선군에 합류한 것이 아니었다. 투항하자마자 그는 조선군에 편입돼 동래, 양산, 기장, 울산 등 경상도 일대에서 늘 조선군의 선두에 서서 일본군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권율, 이순신, 곽재우 등과 서신을 교환하고 그들이 이끄는 조선의 정규군 및 의병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공동작전을 전개했다. 특히 육지전에서 당시 조선군에 없었던 첨단무기인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 패전을 거듭하던 조선군에 조총과 화약의 제조법을 전수함으로써 전세를 반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후 사야가는 이괄의 난(1624), 병자호란(1636)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출전해서 많은 공을 세워 '삼란공신(三亂功臣)'의 칭호를 받으며 당대의 명장으로 천하에 그 용맹을 떨쳤다. '자헌대부', '정헌대부', '주추부시사' 등 조정의 벼슬을 지낸 다음 말년에 이르러 그는 부와 명예를 멀리하고 사슴을 벗 삼아 살겠다고 우록동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유유자적하게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니 행여나 고향소식을 전해주지 않을까 괜한 생각에 잠기네. 생전에 부모님 소식도 알 길이 없는 내 신세가 한탄스럽구나.('南風有感'에서)' 평화를 희구하고 대의를 지키기 위해 조국을 등지고 사랑하는 이들을 버리며 조선에 목숨을 바친 젊은 왜장 사야가. 현재 우록동 어귀에 세워진 녹동서원에는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의 숭고한 생애를 기리기 위해 한국은 물론 조국인 일본에서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사야가 외에도 당시 조선군에 투항하고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에 참가했던 '항왜(降倭)'들의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는데 그들의 삶을 조명한다면 증오와 대립의 테제에 묻혀져 버린 한일 역사학에 상생과 공동발전의 새로운 어젠다를 던져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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