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찬순 시인·희곡작가

▲ 임찬순 시인·희곡작가.

[임찬순 시인·희곡작가] 상신록(相臣錄)을 아는가, 조선조 때 내리 열명의 정승을 낸 집안에게만 그들의 행장을 적은 책이다.

정말로 한 가문에서 정승을 열명이나 배출한 경우가 있을까?

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부터 10대손 이유원까지 영의정을 낸 그들의 집안이다.

그 가운데서 백사의 10세손 이조판서 이유승은 슬하에 6형제를 뒀는데, 넷째가 우당 이회영(友黨 李會榮 1867~1932)이고 다섯째가 초대 부통영을 지낸 이시영(李始榮 1869~1953)이다.
 
옛 로마 제국에서는 전쟁이 터지면 귀족들이 맨 앞장서서 전쟁터로 달려가 용감하게 싸우고 죽는 것이 예사였고 또 영국의 귀족들이 다니는 이든학교학생들이 2차대전이 터지자 한 학년 전체가 전쟁에 뛰어들어 힘껏 싸우다가 한사람도 빠짐없이 전사했다한다. 그것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한다.

즉 귀족 또는 갖은자가 솔선수범 한다는 말이다. 나라가 부강하려면 그래야 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지난 1910년 경술국치 그 망국과 맞닥뜨렸을 때 조선조의 양반들이나 가장 많이 가진 자 들은 어땠을까 거의 다 라고 할 만큼 조국을 위해 아무것도 내놓지 않고 반대로 자신을 지키고 가진 것을 더욱 끌어안기 위해 오히려 조국을 무참히 등지고 친일파가 된 자 들이 '친일인명 대사전'에 7000명이 넘는다.

그 뒤 그들은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라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때 우당 이회영가의 행동은 우리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으뜸이기 때문이다.

나라가 망하자 우당은 형제들을 다 모아놓고 피를 토하듯 말했다.

"국가가 송두리 채 패망했으니 우리는 갖은 걸 깡그리 내려놓아야 합니다. 망명을 떠나서 일본과는 눈길로 마주쳐서는 안됩니다. 중국에 가서 한껏 독립운동에 모두를 바칩시다."

그렇게 전 재산을 톡톡 털어 40만량을 만들었다.

그것을 지금 돈으로 따지면 600억 쯤 된다고 했다. 

여섯 가족 60명이 마차 12대에 나눠 타고 서울을 떠나 압록강을 건넜다.

1910년 눈보라 치는 12월이었다. 마지막 남대문을 지나며 이시영은 "내가 이문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없다면 내 자손들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또 내가 이 문을 나가는 순간부터 어떤 고통과 역경이 닥쳐도 나는 결코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도 허물치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가 외무부 교섭국장 실무자로 있을 때 을사조약 체결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그 조약을 적극 반대 하고 사표를 던졌다. 고종은 다시 그를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했다.)

우당 가족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유하현에 정착해 1912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그 학교는 1930년까지 3500명의 의기 높은 독립군을 배출했고 그 속에는 이범석, 변영태, 김도태, 오광선 우당의 장남도 있다.

그들은 훗날 일제 최대의 독립전쟁 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는 혁혁한 공로를 남겼다.

그 가족은 전 재산을 모두 바쳤고 말년에는 아주 궁핍하게 살았을 뿐 아니라 이시영외 모두 중국에서 순국했다.

눈물겹다.

부귀영화가 가득 찼던 최고의 명문가가 이렇게 모든 것을 조국을 위해 다 털어 바친 예를 세계 어느 곳에서 달리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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