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영 서원대 교수] 장식이라고는 거의 없는 필자의 방에 오래도록 걸려 있었던 액자가 하나 있다. 예전에 서울대박물관 전시를 보러갔다가 기념품점에서 사온 조선시대 문인화가 윤덕희(1685-1776)의 '책 읽는 여인'이다. 그때는 화가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진짜 그림도 아닌 그림 사진일 뿐인데 유리까지 끼워놓은 액자를 사들고 온 것은 오로지 작품 속 여인의 자태에서 번져 나오는 묘한 분위기가 지닌 매력 때문이다.

지금 사는 집에는 벽에 못을 치기 어려워 액자를 책상서랍장 위에 올려뒀다가 며칠 전 문득 액자를 학교 연구실에다 갖다 놓을까 싶어 꺼내놓으면서 다시 보게 됐다.

실제 '책 읽는 여인' 그림은 20cm×14.3cm의 자그마한 크기로 된 18세기 그림이다. 이 그림은 여성을 그림 한 가운데 크게 주제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아녀자의 일상적인 모습으로는 쉽게 떠올리기 어렵게 뜰에 나와 탁자 위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 여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여인은 화려한 무늬나 장식이 없는 단순한 모양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으며 머리타래 위나 몸에 아무런 장신구도 하지 않은 소박한 차림새를 하고 있다. 허리는 반듯하게 세우고 고개를 살짝 아래로 내린 채 눈길은 책을 향하고 있는 여인의 동그스름하게 갸름한 얼굴 위 이목구비도 단정하다. 치마의 풍성한 주름 결에서 드러나는 오른 무릎을 살짝 벌려 탁자에 가볍게 걸터앉고 왼발 뒤로 오른발을 포갠 실루엣은 다소곳한 부녀자의 자태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군자의 절제된 모습처럼 느껴진다.

오른손으로는 책을 받치고 왼손으로는 책의 글자 한 자 한 자를 짚어가며 읽어 내려가면서 발견해가는 은근한 기쁨이 입술에 번진 여린 미소에 어리는 듯하다. 여인의 바로 오른쪽 뒤편에는 늘어진 가지 위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얼핏 봤을 때는 정원 풍경에 있는 새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탁자 뒤에 세워놓은 커다란 한 폭짜리 병풍에 그려진 그림이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몸집에 우아한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 살포시 앉아 여유 있게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병풍 그림 위의 새의 모습은 긴 치맛자락 주름을 드리우고 탁자에 가볍게 걸터앉은 여인의 명상적인 모습과 어쩐지 분위기가 닮았다.

새가 앉은 가지 곁으로 길게 휘어진 풀잎은 흡사 병풍 뒤로 드러난 바깥 풍경 속 파초의 커다랗고 시원하게 펼쳐진 잎을 반영하는 것 같다. 다소 고독해보이기도 하는 홀로 있는 여인 곁에 앉은 병풍그림 안의 새가 담담한 군자의 사귐 같은 은근한 위로를 준다. '책 읽는 여인'은 조선시대 규방에 머무는 아녀자의 부덕이나 고운 자태의 여성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뜰에 나와 책을 읽고 고요히 내면을 응시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시대와 신분, 성(性)의 한계에 갇히지 않는 높은 정신성의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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