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숙 열화당책박물관 학예연구실장] 한국 화단의 큰 별 하나가 떨어졌다. 20세기 한국 실경산수화의 선구자 창운 이열모 화백은 지난 1933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2016년 2월 24일 오전 3시 로스엔젤레스에서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3월 1일 오후 6시, 지금 윌셔연합감리교회에서는 고인의 장례식이 진행 중이다.

선생은 서울대 미대와 동 대학원을 나온 뒤 조오지워싱턴대학과 하워드대학원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경희대, 성균관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팔판동 월전미술관 관장을 지냈다.

그는 청백리다. 이는 청렴한 아버님의 영향과 공짜는 절대로 바라지 말라는 어머님의 가르침 때문이라며, 이것이 참 기독교 정신이라 했다.

선생은 실천주의적 예술가요 올곧은 선비정신을 지닌 교육자다. 그는 실경의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사생 현장에서 작품을 완성하는 독특한 화법을 개척했다.

소박한 자연주의를 표방하며 주로 한적한 시골 풍경을 화폭에 담았고, 초겨울의 나목을 근경으로 묘사했다.

2006년 8월 도미, 2015년 5월 병환으로 절필하기까지 10년 간 타국에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다.

매일 오전 9시 화실로 출근하고 오후 5시 퇴근했다. 차가 없어 왕복 1시간을 매일 걸었다.

작가는 죽는 순간 붓을 놓는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예술관 못지 않게 선생의 교육관도 뚜렷하다. 후학이나 제자들과 사생을 다니다가 자신을 닮는 이가 있으면 '나는 화단에서의 지위가 있어 괜찮지만 나를 닮으면 작가로는 죽는다'는 말로 그를 물리쳤다.

자신을 닮지 않아 끝까지 동행한 제자는 공주 사람 고 엄기환이오, 떠나보낸 후학은 청도 사람 박대성이다.

엄 화백은 피기도 전에 떨어진 꽃이 됐으며 박 화백은 자력으로 화단의 거목으로 우뚝 섰다.

선생은 "엄 화백은 큰 재목인데 아까운 사람이 일찍 갔어. 박 화백은 천연과 공부를 겸했으며 늘 책을 가까이 하니 작품이 좋아지지 않을 수 없지. 그는 1세기에 한 명 나올 걸출한 예술가야"라고 먼저 간 제자를 기리며 독학으로 대성한 후학을 격려하기도 했다.

선생은 그림을 그리면서 여행과 독서와 음악을 즐겼다. 특히 클래식 음악과 정신적인 교감을 가졌다.

이는 말년의 투병 생활에서도 이어졌다. 내가 본 그는 병실에서는 책을, 정원에서는 일광욕을 즐기면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이 속에 천 곡이 넘는 클래식 음악이 들어있어. 음악 감상이 나의 유일한 낙이야" 하면서 까만색 MP3 플레이어를 가리키는 모습이 평온했다.

그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절대로 눕지 않았다. 하루 종일 휠체어에 앉아 있으면 힘들지 않으시냐 했더니 그럼 어떡하느냐며 도로 반문했다.

이처럼 그는 작품에서 뿐 아니라 투병 중에도 노경의 미를 보여주었다.

보은에 세워질 미술관에 관해서는 '조국이 그래서 좋은 거지'라고 떠나온 조국에 감사했다.

그래도 자신은 복이 있어 붓을 벗 삼아 자연에 취한 한평생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이제 고해의 이승을 떠나 저 세상에서 부디 편히 쉬시고, 장차 고향에 세워질 이열모미술관에서 부활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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