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영 서원대 교수] 아버지께서는 예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1669) 앞에 섰을 때 어떤 경외감 같은 느낌이 들면서 처음으로 그림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때 나도 사진으로 작품을 다시 음미해보았는데 집을 나가 방탕한 생활을 하다 거지가 되어 온 아들을 안아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그 그림에서 아버지의 한쪽 손은 크고 두꺼운 손으로 다른 한쪽 손은 가늘고 여린 손으로 그려진 것이 인상적이었다.

모성과 부성이 함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진실을 담아내고자 화가가 상식적인 사실성을 넘어선 것이다.

이후 렘브란트의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1642)이라는 작품에 대해 듣고 인터넷에서 찾아보았을 때 '돌아온 탕자'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 그림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에 있다고 하니 다음에 러시아에 가게 되면 렘브란트의 두 그림을 꼭 실물로 보고 싶다.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에서 크고 듬직한 요나단의 품에 머리를 파묻고 흐느끼는 다윗의 모습은 '돌아온 탕자'에서 굶고 지친 아들이 아버지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는 모습과 닮았다.

요나단은 이스라엘 첫 왕인 사울왕의 아들이다. 사울이 다윗의 명망이 높아지는 것을 알고 그를 시기하고 두려워하여 죽이고자 한 것과 달리 요나단은 다윗을 감싸고 보호해주며 더 깊은 믿음의 차원에서 다윗을 품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터번을 쓰고 기품 있는 옷차림을 한 요나단은 한없이 애처로워하는 표정으로 다윗을 감싸주고 있다. 다 헤어진 옷에 벗겨진 신발에서 드러난 발에 떼가 그대로 묻어 있는 거지꼴의 탕자와 달리 다윗은 요나단이 준 겉옷과 칼을 차고 있는 고귀한 차림을 하고 있긴 하지만 힘없이 고개를 숙인 그의 모습은 사냥에 쫓기는 연약한 짐승처럼 가련하게 보인다.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지만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기뻐하는 아버지처럼 요나단은 자신의 명예에 위협이 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다윗을 위하는 마음으로 그를 걱정해준다. 그러면서도 요나단이 죽음의 순간까지 아버지 곁을 지킨 것을 떠올릴 때 그의 인간됨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故 김영운 목사님은 나이가 들면서 성경을 읽을 때 차츰 주요인물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인물들의 가치가 눈에 띄게 된다며 그 예로 요나단과 헷사람 우리야를 드셨다. 물론 다윗도 요나단의 우정에 끝까지 신의로 대하였지만 두 사람의 우정에 관해서만큼은 요나단의 마음이 진정 숭고하게 느껴진다. 요나단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는 싶어도 솔직히 내가 요나단 같은 친구가 되고 싶다고는 감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우정이 높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요나단이 되어주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요나단과 다윗을 떠올릴 때면 진심으로 서로를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의 친구가 있었으면 하고 기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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