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에 시동을 건 남편은 운전석 옆의 차창을 열며 소리쳤다.
"애들 잘 챙기고 있어. 일자리 구하는 대로 바로 소식 전할게."
순간 난,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때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두 아이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앞으로 뛰어 나갔다. 그리곤 아빠를 불러대며 멀어져가는 차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빠∼! 가지 말아요∼!"
"아빠∼! 아빠∼!"
그러나 남편은 차창 밖으로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였을 뿐 빠르게 아파트 정문을 빠져 나갔고, 큰 길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멈추지 않고 차를 향해 달렸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그 때 10살이었던 아들이 이제 20살이 되었으니 세월이 참 많이 흐르긴 흘렀다. 그런데도 난 그 날 내 옆을 휘돌아가던 그 차가운 바람과, 아빠차를 따라가다 지쳐 돌아오던 아이들의 축 늘어진 어깨를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imf!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우리의 잘못으로 기인했다는 1997년 외환위기는 서민들에게 참 많은 아픔을 안겨 주었다.
그 시절 무풍지대에 살았던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다면, 그는 그저 못살았던 사람들의 가정사로 흘려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린 그 때 자신들의 쓰러지는 회사를 다시 세워보려고 월급도 받지 못하면서 애를 썼던 많은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끝내 부도 처리되는 회사를 뒤로하며, 새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아 다녀야 했던 많은 가장들의 눈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행히 남편의 성실함 덕분으로 우리 가정은 imf를 딛고 일어설 수 있었지만, 그 때를 기억하면 결코 즐겁지 않다. 그래서 난 그 후로 더 열심히 일하며 살았던 것 같다.
항상 검소하고 절약하면서…. 나뿐만이 아니라 그 어려운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뒤숭숭하다.
항간에는 10년 전의 그 imf 외환위기가 다시 왔다는 말들도 돌아다닌다. 그 때 마다 난 아닐 거라고 고개를 저어보는데, 여기저기에서 문을 닫는 회사들이 생겨나는 걸 보면 심상치 않다. 더욱이 이번엔 우리와 상관없는 미국발(發) 금융 위기로부터 왔다니 기가 막히기도 하다.
우린 그동안 참 열심히 살았는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다른 나라의 영향을받아야할까? 하는 생각도 가져보지만, 이런 사태가 오기까지 우리에게도 잘못이 없진 않았으리라. 그러니 피할 수 없으면 당당히 맞서야 하겠지. 그래도 우리에겐 10년 전에 이미 겪었던 경험이 있으니 조금은 담담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위기는 우리에게 또 다른 교훈을 남길 것이란 기대를 가져 본다. 하지만 난 아직도 10년 전 그 날의 아픈 기억은 절대로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낯선 도시로 일자리를 얻기 위해 떠나던 남편의 쓸쓸한 뒷모습과 아빠를 부르면서 무작정 달려가던 아이들의 울음 섞인 목소리를'
그래서 이 순간 어느 하늘 밑에서 내가 겪었던 아픔을 누군가 또 겪지 않기를 그저 두 손 모아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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