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참으로 신통하다. 저녁나절 무심히 집으로 들어서려는데 담장 가에 심은 두릅 순이 우뚝 올라와 눈길을 잡는다. 분명 엊그제 모조리 다 따냈는데 어느새 저리 몸을 키웠나 놀랍다. 반찬 한 가지는 벌었다싶어 얼른 소쿠리를 들고 나와 두릅을 따고 보니 발치에선 고사리가 어정거리고 있다. 고사리 역시 겨우 이틀하고 반나절 지난 사이에 한 뼘이나 자라있다. '오뉴월 하룻볕'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짧은 봄볕의 위력을 직접 피부로 접하고 보니 새삼 신기하다.

 지난 일요일이었다. 서울 사는 큰형부가 일이 있어 시골에 내려왔다고 전화를 하셨다. 마침 산나물 뜯어다 삶아 놓은 것이 있기에 챙겨 보낼 요량으로 들러 가시라 했다. 그래도 시골하면 금방 뜯은 푸성귀 싸 보내는 것이 인정 아닌가.
 
 마당에 푸성귀는 이제 막 싹이 올라오는 상태이고, 두릅과 고사리가 먹기 좋을 만큼 순을 내밀었기에 툭툭 꺾어 보니 작은 소쿠리로 한가득 된다. 산나물과 두릅, 고사리, 이만하면 큰언니가 모처럼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흐뭇했다.

 언니에게 뭘 챙겨 보내는 일은 극히 드문 경우다. 띠 동갑이다 보니 주로 보살핌을 받아온 편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는 말이 시골 사람이지 겨우 제 집 식구 밥이나 끓여먹는 엇박이 주부에 집안 가꾸기도 여벌이다.

 결혼하던 해 허름한 주택 하나를 구입하여 지내온 것이 그러저러 30년 세월이다. 남편은 앞뜰 뒤뜰에 상추, 아욱, 쑥갓 등 몇 십 가지나 되는 푸성귀를 심어 가꾸었다. 정성이 지나쳐 늘 실한 결실이 넘쳐났다. 넘치는 것이 문제였다.

 아이들 어렸을 때는 그래도 집안에 많이 들어앉아 있으니 남아도는 것은 아파트 사는 친구나 이웃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생활이 자꾸 바깥으로 향하게 되면서 나눠주는 것도 성가신 일이 됐다. 점점 남편이 가꿔놓은 푸성귀에 눈총이 가기 시작했다.

 시골 살이, 그 중에서도 주택에 산다는 것은 잔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생활이다. 자고나면 풀이요 돌아서면 일이 밟히지만 모르는 척 눈감고 지낸 지가 여러 해 된다. 집안은 풀들이 살판났다.

 남편은 집안 텃밭조차 등한시 하는 내 꼴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텃밭에 머물던 눈을 아예 집 밖으로 돌렸다. 직원들과 밭 한 뙈기 얻어 몇 고랑 가꾸는 재미에 푹 빠져 산다. 배추를 심던 자리는 꽃 잔디가 대신 들어앉았고, 나머지 공간에는 갖은 풀들이 주인의 눈길 뜸한 틈을 타서 단단히 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취나물과 쇠뜨기, 민들레가 친구가 되어 속살댄다. 땅 두릅과 당귀도 영역다툼 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향기를 내고 있다. 풀 반 냄새 반이 공존하고 있는 우리 집 뜰 앞에서 자유와 방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저들이 이리 실하게 제 몸을 키우고 있는 것은 제 깜냥대로 살 수 있는 자유에서 비롯된 것인가. 무한한 햇살이 그저 따습게 내려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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