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그리스 신화에 보면 “판도라의 상자”라는 것이 나온다. 판도라는 여러 신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많은 매력을 가진 여인이었다. 신들은 각자의 재능을 이 여인에게 주었는데 그 중에 헤르메스는 판도라에게 호기심을 부여했다. 신들의 왕 제우스는 이 여인을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냈는데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를 부인으로 삼았다. 당시 그의 집에는 만물에게 좋은 재능들을 부여해준 후에 남은 온갖 해가 되는 질병과 질투, 죽음과 같은 나쁜 것을 담은 상자가 있었다. 그래서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에게 절대 이 상자를 열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호기심이 가득한 판도라는 결국 그 상자를 열게 되었다. 이후 인간 세상에는 질병과 죽음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판도라는 급히 상자를 닫았지만, 상자 안에 있던 것들은 이미 다 빠져 나간 후였고 오직 하나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결국 판도라의 상자는 인간 세상의 여러 문제와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는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 역시 알려주고 있다.

성경에는 이 ‘희망’이란 것에 대하여 다르게 말하는 이야기가 있다. 다니엘서 3장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등장한다.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을 정복했던 바벨론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그런데 바빌론 왕의 신상에 절을 하지 않아 고발되었다. 그 벌로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그들을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겁게 달군 풀무불에 넣으라고 명령한다. 이 때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 왕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이 세 친구는 먼저 자신들이 믿고 있던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 위기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판도라의 상자가 말하는 희망과 비슷하다. 삶에 큰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당장의 현실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며 문제를 이겨나가는 것, 바로 그 힘이 ‘희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 희망을 말한다. “능히 건져내시리이다”

그런데 그 다음 이들의 고백은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희망’과 조금 다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자신들이 품고 있는 희망이 혹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들의 결심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희망의 본질이 있다. 판도라의 상자에 왜 온갖 재앙과 희망이 함께 있었는지에 대해 해답을 알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이것에 대해서 희망은 인간에게 내려진 달콤한 재앙과 같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진정한 희망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진정한 희망이란 성경의 다니엘서에 나오는 것과 같다. 미래에 대한 소망과, 그렇게 되지 않을지라도 현재의 내 결심과 결단이 결코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함께 한다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며 산다. 하지만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사는 것은 아니다. 희망은 미래를 꿈꾸는 것이지만 미래에 반드시 내가 바라는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기에 참된 희망은 단순히 자신이 바라는 일이 일어나기를 소망하는 것을 넘어서 생각지 못한 일이 닥쳐올지라도 그 마음과 생각이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결심에서부터 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희망이 우리 삶에 선물이다. 선물에 값을 치루지는 않지만 그것으로 내 삶이 더 풍성해진다. 희망과 확신이 함께 할 때, 희망은 여러 재앙과 함께 봉인되었던 선인지 악인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며 신의 귀한 선물이라는 깨달음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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