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인순

새로운 운동기구가 하나 들어 왔다. 경사계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산에 오르는 효과를 내기 위한 기구인 것 같다. 헬스장에 수십 종의 운동기구가 있지만내가 사용하는 것은 대여섯 가지 정도이다. 그것도 관장님이 내게 권한 것뿐이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야릇하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구들이 많지만 섣불리 사용하지 않는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런닝머신 속도를 잘못 조절하여 넘어질 뻔 한일이 있고 난 후부터 두 팔을 휘휘 흔들지도 못하는 겁쟁이다.
새벽 등산을 하고 싶지만 어두운 산속에 들어간다는 것 또한 나에게는 공포이다. 그리고 겨울 산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신경을 써야하는 일도 새벽 등산을 선뜻 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관장님에게 새로 들어온 기구를 사용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춥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고 위험하지도 않으면서 등산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최적의 기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원을 켜자 계단이 철커덕내려온다. 몸무게가 실리고 그 몸무게에 의해 계단이 밑으로 내려가면서 다른 계단이 또 다시 나타난다.
광덕산 가파른 길을 오르던 느낌이다. 5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숨이 가빠온다. 그러나 쉴 수도 없다. 계단은 정확한 간격을 두고 끊임없이 내려온다. 뉴스를 본다. 가끔씩은 듣지 말았으면 좋을 것 같은 뉴스가 귓전을 때린다. 운동 기구를 골라서 사용 하듯이 뉴스를 골라보고 싶다. 그러나 뉴스 역시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몇 번이고 반복하여 내 무의식에 침투한다.
공포가 소요를 일으킨다. 경기침체, 최악의 실업 상황, 기업 구조조정.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이제는 희망 메시지를 좀 찾아보자.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한다면지금이 위기라면 기회이기도 한 것 아닌가. 어떤 기회가 지금 우리에게 있는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을 간절히 만나고 싶다.
모니터에 그려진 산에 붉은 점선이 차 올라간다. 가빠지던 숨결이 차츰 평온해지기 시작한다. 고비는 넘겼는가 보다. 견딜만한 고통으로 끊임없이 계단을 밟으며 문득 에스컬레이터를 생각했다.
내 삶이 치열하다고 느끼던 어느 날 문득 나는 하행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고 있는 것 같은 나 자신을 발견했다. 삶이라는 시스템은 운동기구처럼, 에스컬레이터처럼, 하루 24시간이 어김없이 매 순간 사라진다.
내가 잠시라도 쉬면 현상유지를 하지 못하고 뒤처지고 마는 것이다.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으면 절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 내게 주어진 역량보다 더 큰 보폭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야 겨우 한 칸을 앞설 뿐이다.
숨차게 달려서 앞선다고 해도 잠시 쉬고 있는 사이에 시간은 나를 뒤로 하고 넘어 간다. 힘이 들어 계단을 밟는 속도가 느긋해지자 한 칸 아래로 추락한다. 주어진 속도이상을 지킬 때에야 비로소 나는 제자리에 있는 것이다. tv 뉴스는 계속되고 나는 더도 덜도 말고 꼭 그만큼 씩만 발자국을 옮기며 산에 오르듯이 앞을 향한다. 우울증 환자처럼 무력해진 뉴스를 끄고 땀이 흠뻑 밴 개운한 몸으로 기구를 내려선다. 등산로는 산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tv 다시보기를 통해 중소기업 성공신화를 보거나 노익장을 과시하며 아침마당에서 강의했던 류태영 박사의 도전기를 보고 싶다. 남들은 오르는 물가에 한숨만 쉬고 있을 때 열정적인 사람들은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 전시물품을 한 보따리 싸고 비행기에 오르고 있을 것이다. 실직이라는 사건을 불행하게만 바라보지 않고 수년간 노동을 통해 쇠약해진 몸을 보충하는 시간쯤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사건을 바라보는 비합리적 신념이 자신을 불행한 결과로 몰아넣는다. 달리고 있는데 힘이 들지 않는 다면 내리막길 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있다. 지금 어렵고 힘이 든다면 그것은 오르막을 위한 연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저절로 되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움직이고 도전해도 안 되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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