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환 한국자산관리공사 심사조정위원

 

[황종환 한국자산관리공사 심사조정위원] 벌써 완연한 무더위가 온 몸을 감싸는 성하(盛夏)의 계절이 다가온 듯하다. 6월은 나라와 민족의 안녕과 자유 수호를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달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 왔다가 저 세상으로 결국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문제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사는 것이 삶의 목적에 합당한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이다.

 작년에 발표된 OECD의 ‘2015 더 나은 삶 지수’에 따르면, 한국이 36개국 중 27위를 차지했다. 11개 세부 항목 중에서도 ‘일과 삶의 균형’은 33위로 겨우 꼴찌를 면한 수준이기 때문에 범정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죽음의 질 지수에서는 영국은 1위, 한국은 18위로 나타났다. 영국은 포괄적인 완화의료 정책인 호스피스 제도의 운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고, 우리나라도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이 향후 완화의료 정책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란 기대 때문에 높았다고  분석하고 있다.

최근 사람들의 관심사는 어떻게 잘 죽느냐(well dying)를 어떻게 사느냐(well being)만큼 중요하게 인식하는 것 같다. 맹목적인 생명의 연장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편안하게 마지막을 보낼 것인가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대부분 국가의 복지정책은 구성원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목표에 두고 있으며, 양적인 팽창과 풍요에서 정신적 만족과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삶으로 변화하고 있다. 물질적 풍요는 인간다운 삶의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소득과 물가, 주거복지, 교육 및 문화의 수준, 사회안전망 등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 삶의 의지 등 주관적인 개념이 통합하여 만족감과 행복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스럽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최근 호스피스병원에서 주관한 자원봉사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평소 삶과 죽음에 대한 관심이 있기도 하였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까라는 고민이 더욱 많았기 때문이다. 현장실습에서 목욕봉사로 만난 말기 환자들이 비록 몸은 불편할지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모습에 스스로 삶의 도전과 위로를 받았으니 아이러니하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인지 조금이라도 해답을 얻을 수 있어 다행스럽기도 하다.

호스피스(hospice)는 임종이 임박한 환자들이 편안하고 인간답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위안과 안락을 베푸는 활동이다. 비행기에 비유하면 사람이 태어나 이륙(well-being)하고, 인생의 항로에서 행복한 생활(well-aging)을 하고, 마지막 종착점에 안전하게 착륙(well-dying)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생이라는 비행기의 안전한 착륙을 돕는 역할을 하는 활동이다.

호스피스 병동이라는 시 한편이다. 며칠 후면/한 사람이 하늘로 떠날 것이다./먼저 떠나는 사람과/남아 있는 사람/지상의 대합실은 슬픔으로 붐빈다./아무도 모르는 그곳/구름보다 더 높이/영원보다 더 오랜 곳/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가고 또 가도 채워지지 않는 그곳/마지막 이별의 슬픔은/언제나 남아 있는 자의 몫이다./며칠 후면 이곳에/또 다른 사람이 와서/하늘로 떠날 것이다. 이곳을 마지막 이별의 슬픔으로 붐비는 자리이며, 이별은 언제나 남아 있는 자의 슬픔이고, 며칠 후면 떠난 자리에 다른 사람이 채워져 하늘로 떠날 슬픈 준비를 하는 곳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세상에 영원히 존재할 수 없음에도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은 삶의 기로에서 머뭇거리거나 방황할 때 순간순간 선택을 강요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죽음의 문제를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죽음이라는 문제는 올바른 삶의 이정표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한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신앙, 가족, 인간관계, 소유물과의 문제 등을 다시 생각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섬기는 절대자 외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내일을 알 수는 없다. 내일이 다시 오지 못한다 할지라도 떠나고 난 후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슬픔과 짐이 남아있지 않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어떻게 사느냐 만큼이나 어떻게 죽느냐에 대한 본원적인 문제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음에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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