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전 청주고 교장·칼럼니스트

 

[김재영 전 청주고 교장·칼럼니스트] 녹음이 짙어가는 6월, 뻐꾸기 노래 소리를 들으며 6월을 맞게 되니 만감이 오간다. 6·25 전쟁 때 전사한 이름 모를 들꽃과 함께 묻혀있는 연고자 없는 무명용사의 묘를 찾아 발굴 작업을 한다는 오래전의 기사가 떠오른다.

 현충일인 지난 6일 가요무대에서 '숭고한 넋을 기리며'라는 무대를 집에서 보았다.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 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안수 떠 놓고서 이 아들의 공비는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 부시여 울었소. 아~ 쓸어안고 싶었소"로 불린 '전선야곡'의 가사이다. 노래를 듣고 있으니 초등학교시절 참담했던 남침현장이 떠오른다.

 동족상잔의 6·25전쟁,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동족이 쓴 총탄에 산화했는가? 젊음을 빼앗긴 채 가족의 품에도 안기지 못한 채 66년 세월을 이름 모를 산하에서 떠도는 영혼들이 그 얼마였던가? 돌이켜 보면 9백여 회의 외침을 받아옴 우리의 역사는 시련의 역사요, 눈물의 역사였다.

 계백 장군이 이끈 5천결사대의 장렬한 전사로 백제가 망하자 소정방은 의자왕을 비롯하여 왕자, 장사 등 1만2천8백7명을 이끌고 당(唐)으로 개선했다. 병자호란 때는 지금의 송파인 삼전도(三田渡)에서 우리 임금인 인조는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군신의 예를 올리며 치욕의 한(恨)을 남겼다. 시인 김소월이 사랑하던 여인이 가족들과 살길을 찾아 간도 지방으로 떠나자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며 한편의 시(詩)를 남긴 애절한 사연도 나라 잃은 설움이 아니겠는가.

 성도 우리글도 빼앗겼던 암울했던 일제(日帝)시대에 우리는 눈물 젖은 두만강, 황성옛터, 목포의 눈물, 봉선화 등을 애창하며 망국의 한(恨)을 달래지 않았던가. 그래도 그때는 우리에게 일신의 영화를 뒤로한 채 조국 광복을 위해 몸 바쳐온 선열이 계셨고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들이 많았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다. 실업자와 노숙자가 늘어가도 있는데도 일부 지도층 인사와 부유층들은 도덕성을 상실한 채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지탄받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원로(元老)나, 지도층 인사를 찾기 힘들어 허탈감에 빠지게 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거안사위(居安思危),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에 대비하라"는 말과 율곡 이이 선생의 10만양병설을 따랐다면 두 차례 왜란의 참화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6·25 전쟁이 일어 난지 66주기를 맞았다. 남북분단과 이산가족의 아픔은 누구 탓이란 말인가. 국제사회에서 정의(正義)는 힘을 수반할 때 정의로서 의미가 있다. 나라를 위해 순국하신 선열들의 명복을 빌며 다시는 이 같은 아픔의 역사를 겪지 않도록 국력배양에 힘써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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