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환 한국자산관리공사 심사조정위원

 

[황종환 한국자산관리공사 심사조정위원] 추석 연휴가 지나면서 제법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피부로 느끼는 가을의 초입이다. 추석(秋夕)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가을 저녁이다. 가을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뜻으로 유난히 밝은 좋은 명절이라는 의미가 있다. 우리 민족은 추석 때가 되면 가족 친지들과 함께 고향을 찾아 조상을 기리며 감사를 드리는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한가위 꽉 찬 보름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어보는 가장 친숙하고 편안한 명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절에 부담을 느끼거나 스트레스를 경험한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여론조사가 있다. 즐거워야할 명절이 사람들에게 스트레스의 주범이 되고 있다. 올 추석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감정노동에 힘들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가족이나 친척들의 지나친 관심과 걱정이 부담스러워 고향에 가는 것을 기피하고 카페나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젊은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고부 갈등이나 장서 갈등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고 기혼자들은 호소하기도 한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명절에 만나는 친척들은 일상적인 소통이 단절될 수밖에 없고, 젊은 세대들은 개인적 성향의 강화로 인해 가족 간의 일상적인 대화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형편이 되고 있다. 자식이나 후손의 장래를 생각해서 좋은 뜻으로 관심을 보이거나 덕담하는 것조차 정작 당사자에게는 잔소리로 들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개인은 사생활을 보호하려는 반면 가족은 사생활의 많은 부분을 알고 싶어 하거나 간섭하는 일이 문제가 될 수 있다.

필자는 올해 96세가 되신 모친이 나름대로 정정하셔서 아직은 명절의 기분을 느끼는 편이다. 가끔 TV화면에 비치는 공항 출국장의 모습을 보시고는 당신 때문에 자식들이 명절 연휴에 해외여행이나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곤 한다. 주변사람 특히 자식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다. 언론 매체나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최근 트렌드를 이해하려고 애쓰시는 모습을 보면서 혹여나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에 죄송스럽기도 하다.

우리나라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27.2%를 차지하면서 세대 구성의 주류가 되고 있다. 핵가족 시대를 지나 1인 가구 시대가 보편화되면서 소통이 단절되어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 때가 되면 여러 문제가 표면화된다. 명절에 일어나는 사건이나 사고를 보면 양면이 존재하는 것 같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지 못하여 일어나거나, 혼자 있는 시간에 대한 공허함을 견디지 못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명절을 피하기 위해 출장이나 당직을 자청하거나 취업 준비를 핑계로 집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또한 명절을 쓸쓸하게 보내는 것이 너무 힘들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일부이지만 행복해야할 명절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참으로 서글퍼진다.

온 가족이 한 지붕에서 한 이불을 덮고 살았던 시절에는 가족 중심으로 소통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였다. 하지만 다양성의 현대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의미는 핏줄을 맺은 사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공통의 관심사나 화제가 가장 빈곤한 인간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일터를 찾아 각자 멀리 떠나면서 활동범위가 넓어져 공통의 화제가 부족하게 된 것이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전근대적 가족주의가 따뜻한 가족관계를 만드는 수평적 인간관계의 기술을 익히는 노력을 방해하기 때문에 갈등이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세대 간의 소통의 부재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의 존재는 혼자 있는 시간을 더욱 유익하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다. 이른 새벽에 잠든 자식이 잠을 깰까봐 방문을 살짝 열고 들어와 방바닥이 차가운지 이불속에 손을 넣어 보시고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어렸을 때 심한 감기 몸살로 아파서 누워있는 자식의 손에 사탕과 곶감을 살포시 쥐어 주시는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포근해진다. 혼자 사는 것이 보편화된 세상이지만 그래도 외롭지 않은 것은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이 남아 있는 고향과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부담 없이 다가와서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의 공간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