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얼마나 숭고한 의미를 지닌 말인가. 특정 종교에 기반 하거나 자유, 정의를 내세우는 경우는 있지만 홍익인간처럼 멋진 건국이념을 가진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밖에 없다. 정치이념 뿐 아니라 교육이념으로도 손색이 없는 말이다.
필자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70년대까지만 해도 교실마다 이 글이 붙어 있어서 '널리 이롭게 하는 사람'이 되자는 가르침으로 삼았다. 홍익인간이 삶의 방법이어야 하고 생활 철학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요즘 같은 때에 더욱 절실해진다.
이것이 삶의 방법이 되는 데는 이타성과 공동체의식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 말을 꺼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각박해져 가는 요즘, 우리 사회의 구성원은 더욱 이기적이고 파편화된 개인으로 조각나고 있는 것 같다. 삶의 가치를 생존에 두면서 생존경쟁에서 이기는 데 필요한 도구를 확보하는데 몰두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잘 사는 것 일까?

승자독식이라는 틀을 고쳐야

홍익인간은 인본주의이다. 정치적으로는 독재나 전체주의가 아닌 민주, 자유주의라고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이고 우리는 이 방향으로 꾸준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홍익인간이라는 이념에 입각해서 사회경제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어떠한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시장에 참여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은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참여자들이 만든 어떠한 가치에 대한 공로를 극소수만이 주장하고 편취한다면 공정한 질서라고 할 수 있을까? (더욱이 공로를 인정하지 못할 때도 있다.)
용산참사의 원인에서 보듯이 부동산과 개발이라는 문제에서는 특히 첨예한 갈등으로 불거진다.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그 가치를 상승시키는데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대개 부동산의 가치라는 것은 주변의 여건이 어떻게 변화하였는가에 달려있다). 하지만 지난 수 십 년 동안 부동산의 소유만으로 그 가치를 독식할 수 있었고 부동산 투기를 안 하는 사람이 바보취급을 받을 정도로 부동산 공화국이라는 오명이 남았다.
인간이 출현한 역사는 기껏 십수만년이고 지구라는 땅이 만들어진 지는 46억년이 되었다. 야생의 동물들도 자기 영역을 지키면서 살기는 하지만 인간만큼 땅에 대한 전횡적인 권리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그곳에서 살지 않더라도 등기권리증이 보장하는 권리는 절대적이다. 그래서 공영개발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고 더 나아가 토지공개념을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는 것이다.
특히 이번 용산참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난쏘공'을 30년 전에 발표한 조세희 작가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약자에 대한 폭력을 안타까워하며 '눈앞이 깜깜하다'고 했다.

모두 존중받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

전국토에 망치소리가 들리게 하겠다는 현 정부의 개발 정책 아래에서 용산참사는 언제든 또 재현될 수 있다. 더 이상 철거민을 개발의 걸림돌이나 공권력으로 쓸어 내야할 대상으로 보면 안 된다.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던 사람과 사회가 개발 이익을 나눌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나오기를 바란다. 이번 기회에 승자독식의 사회구조 전반을 되돌아 볼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생존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일까? 만인이 만인을 향한 경쟁과 투쟁만이 존재한다고 하면 우리는과연 잘 살 수 있을까?
우리는 더 이상 먹이를 구하는 활동이 생존에 필수적이었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높은 가치이다. 모두가 존중받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홍익인간의 정신이다. 나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믿는다.

▲ 손현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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